높고 새로운 건물이 도시를 채우고 있는 요즘, 낮고 오래된 건물이 모여서 만들어낸 경관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의 북촌과 인사동으로, 전주의 한옥마을로, 군산의 월명동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낮고 오래된 건물이 모여서 만들어낸 경관을 지키고 활용하려 노력한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인천역 주변이다.
인천역 주변은 우리나라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갖고 있다. 1883년 인천이 개항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1899년 개통되면서 한적한 어촌마을이었던 인천역 주변은 도시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격자형 도시계획이 시행됐고, 일본 조계지, 청국 조계지, 각국 조계지에 외국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외교가와 금융가가 형성됐다. 항구는 공장을 불러들였고, 공장은 노동자를 불러들였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그렇게 100여년 전 만들어진 시가지는 중국풍, 일본풍, 서양풍 주택으로, 은행, 관청, 우체국, 사교장, 공원으로, 공장, 사무실, 창고 등의 생산물류시설로 흔적을 남겼다. 인천상륙작전과 그 후 60여년의 세월동안 많은 오래된 건물들이 철거됐지만, 인천의 도심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오랜 세월 침체를 겪은 덕분에(?) 개발의 바람을 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지금의 경관이 남아있게 됐다.
그렇게 남겨진 경관은 지역의 자산이 되어 최근 많은 사람들을 인천역 주변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오래된 낮은 건물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건물을 활용해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개성있는 가게를 열었다. 멋진 가게가 늘어나자 지역은 점점 활성화되었다.
민간 영역에서 장소를 살려나가고, 점점 인천역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금, 공공 영역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작년 5월 28일에는 인천역 주변의 근대건축물을 활용한 인천개항장 야행 행사가 있었다. 이틀 뒤, 인천역 왼편에 있는,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인 옛 애경사 공장이 철거됐다. 철거 주체는 인천 중구청이었고, 철거 이유는 근대건축물이 모여있는 마을인 동화마을을 찾는 관광객의 주차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올 10월 18일에는 공기업인 코레일이 현 인천역을 부수고 25층짜리 복합역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지금의 인천역은 1960년에 만들어진, 수도권 전철로는 유일하게 그 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낮고 오래된 인천역은 역시 낮고 오래된 건물들로 이루어진 주변과 잘 어울린다.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은 인천역에서부터 강한 첫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코레일은 25층짜리 숙박, 상업시설을 짓겠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인천역 오른쪽 옛 러시아영사관 부지에는 29층짜리 오피스텔 건축이 진행되고 있음이 시민사회에 알려졌다. 이 건물은 민간이 지으려 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공영역과 관련이 있다. 지역 언론에 따르면 중소기업중앙회 인천지역회장, 전 중구청장 친인척, 인천시주민자치연합회장의 딸 등 공직 사회와 연관이 있는 세 명이 이 땅을 53억원에 매입한 후, 29층짜리 오피스텔 건축허가를 따냈고, 바로 건설회사에 130억원에 팔았다는 것이다. 인천시는 건설사로부터 땅을 사거나 대토를 통해 개항장에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것을 막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건축허가과정이 적법했는지 검토하겠다고 했다.
인천시가 뒤늦게나마 인천역 주변의 장소성을 살리기 위한 움직임에 나선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코레일의 인천역사 철거 후 개발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물론 도시에는 높고 새로운 건물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일부러 만들 수도 없는, 오랜 세월이 쌓여 만들어진 독특한 장소성을 공공이 나서서 파괴해서야 되겠나.
최성용 도시생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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