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노조 무풍지대’였던 회계업계에 노동조합이 생겼다.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을 둘러싸고 사측과 접점을 찾지 못한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들은 노조를 만들었다. 감사기간마다 격무에 시달려온 젊은 회계사들의 노동자성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국내 1위 회계법인의 노조 탄생이 업계에 미칠 파장 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삼일회계법인지부는 지난 15일 설립 총회를 개최하고 초대 지부장으로 황병찬 회계사를 선출했다고 16일 밝혔다. 노조는 법인 직원들로부터 가입 신청을 받은 뒤 다음주 중 사측에 단체교섭요구서를 전달할 계획이다. 삼일회계법인은 1971년 설립 이후 47년간 노조가 없었다.
삼일회계법인의 노조 설립은 내년 주 52시간제 도입을 앞두고 유연근무제 협상을 위한 근로자 대표 선출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진 게 발단이 됐다. 유연근무제는 여건에 따라 근무 시간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일이 많이 몰리는 기간의 노동 시간은 늘리고 다른 기간은 줄여 전체 법정 노동시간을 지키는 식이 많다. 이를 위해서는 근로자 대표와 사측이 서면 합의를 해야 한다. 4대 회계법인(삼일 안진 삼정 한영) 중 안진과 삼정은 근로자 대표단을 선출해 유연근로제 도입 논의를 진행 중이고 한영회계법인은 유연근무제 없이 주 52시간제를 지키겠다는 방침이다.
삼일회계법인도 당초 근로자 대표를 선출해 논의를 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 9월 첫 대표 선출 당시에는 전체 투표 대상자 2,553명 가운데 1,275명(49.9%)만 투표에 참여해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2차 투표에서는 사측이 재적근로자의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결선 투표를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과반 득표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사측은 갑자기 득표율이 높았던 두 후보자를 공동 대표로 선출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직원들이 ‘꼼수’라며 반발하자 지난 7~9일 득표율 1위 후보를 대상으로 다시 찬반투표가 진행됐지만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삼일회계법인에 근무하는 한 회계사는 “투표 진행 과정에서 회사가 사측의 입장을 내세울 어용 후보를 미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커졌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온 회계사들이 노조를 설립한 배경엔 감사 기간마다 혹사 논란이 불거질 정도로 고강도 노동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일회계법인은 이번 유연근무제 논의 과정에서 연간 단위로 평균 노동시간을 계산해 주52시간제를 지키겠다는 안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회계사들은 매년 기업의 재무제표 감사 업무가 몰리는 1~3월 주당 평균 80~100시간 집중적으로 일해야 하는 업무 강도를 개선하려는 노력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3개월 단위 평균 노동시간이 법정근로시간(주 40시간)을 지켜야 하는 근로기준법과도 맞지 않는다.
세계적인 회계법인과 손을 잡은 4대 회계 법인과 국내 중소형 법인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개별 회계사들의 위상이 더 위축된 것도 한 요인이다. 과거에는 대형 회계법인을 나온 회계사들이 중소형 법인으로 이직하거나 스스로 법인을 설립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지만 최근엔 대형 법인 쏠림 현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 분식 사태 등으로 회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실제 업무량도 급증했다“며 “그러나 과거엔 법인을 나가도 갈 곳이 많았지만 지금은 4대 회계법인에서 다른 법인으로 가긴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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