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음을 통렬하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2015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일곱 개를 매일 읽었다. 신문비평을 하는 어느 모임에서 활동하느라 그랬다. 그러므로 제법 많이 알고 기억한다고 믿었다. 그해 5월 20일, 국내에서 첫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확진 판정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떴다.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지만 환자와 밀접 접촉한 사람들을 추적해 격리 조치할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관리 당국의 말이 덧붙었다. 당국자의 말이 무색하게 그 수는 매일 두세 명씩 늘었다. 메르스로 인한 첫 사망자가 나온 게 6월 첫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휘말렸다. 신문들은 메르스 특집 면을 만들어 정부의 늑장 대처와 자본에 눈먼 병원을 질타했다. 사랑하는 이의 장례는커녕 제대로 된 임종 절차조차 없이 처리되는 죽음들의 살풍경을 스케치하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확진자와 사망자, 완치자와 격리 대상자 수를 도표로 보여주었다. 한여름 무더위와 함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기까지, 한 달 넘게 일상을 통째로 집어삼킨 메르스 소동을 겪으며 우리 모두는 적잖은 내상을 입었다.
그래서였을지 모른다. 썰물 빠지듯 신문기사가 사라진 이후 메르스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그 일을 떠올릴 때면, 선명하게 채색됐던 수채화가 한순간 거센 물살에 쓸려 흐릿한 밑그림만 남은 것 같은 당혹감마저 들었다.
김탁환 장편소설 ‘살아야겠다’를 집어든 건 그 때문이었다. 어디서도 제대로 듣지 못한 메르스 피해자들의 서사가 소설 속에 있었다. 2015년 5월 27일 오전. 치과의사 김석주가 F병원 응급실에 간 건 작년에 받은 조혈모세포 이식수술 이후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늘 그렇듯 응급실은 환자들로 만원이었다. 통로 양쪽에 늘어선 대기용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석주 앞으로 수많은 응급환자와 가족들이 오갔다. 밤새 복통에 시달린 동생을 부축한 출판물류회사 직원 길동화, 폐암 4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 병달을 국내에서 제일 잘하는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고 싶어 구급차로 모셔온 방송사 수습기자 이첫꽃송이도 그들 사이에 섞였다. 나흘 뒤부터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세 사람은 이 병원 응급실로 다시 왔다. 그리고 차례차례 메르스 환자로 판정받았다.
영문도 모른 채 격리병실에 갇혀버린 환자들은 고열과 두통과 호흡 곤란에 시달리며 피를 쏟고 정신을 잃다가 죽거나 회복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젊은이 못잖은 체력을 지녔던 중년 여성 길동화는 폐와 호흡기가 망가진 채 석 달 조금 안 돼 퇴원했지만, 내 집 같던 회사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눈물과 기침을 쏟으면서 다른 일자리를 구했건만 그때마다 메르스 환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해고당한 후 삶의 벼랑으로 내몰린다.
메르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섬뜩할 만큼 치밀하고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 소설을 끝까지 차분하게 읽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메르스 환자’라는 낙인 속에서 고통당하는 생존자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애처로워서, 우리가 발 딛고 선 사회의 무능과 야박함에 화가 치밀어서, 무엇보다 150일 넘게 격리 병실에서 사투를 벌이며 죽음의 공포 앞에 홀로 소스라치던 석주의 속울음이 사무쳐서 몇 번이나 책장을 덮고 펑펑 울었다.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작가의 말이다. 아둔함과 완강한 무지를 망치로 깨뜨린 곳에 한 줌 햇살이 스며든 느낌이다. 한없이 부끄럽고 고맙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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