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과학 아는 엄마 기자] 실패 딛고 일어서는 경험 반복 통해 뇌는 기억한다

입력
2018.11.17 10:00
17면
0 0

 ‘사커맘’이 된 까닭 

얼마 전 주말, 아이가 소속된 축구팀이 동네 대회에서 3, 4위전에 진출했다. 동메달 쟁탈전답게 치열한 경기가 펼쳐지던 중, 오른쪽 날개 포지션에서 아이가 건드린 공이 상대 팀 골대를 스치며 그물 안쪽으로 살짝 밀려 들어갔다. 우리 팀 부모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승리의 예감도 잠시, 분위기가 묘해졌다. 심판은 그 황금 같은 골을 점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경기는 이어졌고,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승부차기가 속행됐다. 예전에도 승부차기에서 메달 색깔이 바뀌었던 적이 있어 우리 팀 선수들은 유독 긴장했다. 2번째 키커로 나선 아이가 골문의 왼쪽을 향해 슛을 날렸다. 아뿔싸. 상대 팀 골키퍼 역시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른 선수도 어렵다는 승부차기 선방을, 그 녀석이 해냈다. ‘노(No)’ 메달이 확정된 순간, 골대를 애타게 바라보고 서 있던 아이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경품 추첨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한 뒤 안쓰러운 마음에 두리번두리번 아이를 찾았다. 경기장 한가운데서 친구들과 또 공을 차고 있던 아이의 표정은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글벙글했다. 괜찮냐는 물음에 밥 먹으러 어디로 가냐, 뭐 먹을 거냐, 친구들이랑 차 같이 타도되냐는 동문서답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초딩 선수들의 머릿속에선 이미 억울함도 패배감도 사라졌다.

나는 흔히 말하는 ‘사커맘’이다. 아이의 방과후 시간표를 짤 때 최우선 순위가 축구고, 아이 축구대회에선 월드컵 때보다 더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봄과 가을 축구대회 기간에는 나들이도 쇼핑도 모두 미루고, 대회 전엔 아이 팀 포지션과 전술까지 확인한다. 축구를 좋아해서도, 잘 알아서도 아니다. 아이가 스포츠를 즐기며 몰입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릴 때 운동을 꾸준히 하면 성장이나 학업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는 많이 나와 있다. 실컷 뛰고 나면 공부에 대한 의욕이나 흥미가 더 생기고, 규칙적으로 움직일수록 뇌에 혈액과 산소가 넉넉히 공급돼 기억력이나 학습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아이가 스포츠를 통해 꼭 배웠으면 하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사회성이다. 스포츠는 한창 발달하고 있는 뇌세포에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심어줄 수 있다.

어린이의 뇌는 어른보다 유연성(Flexibility)과 가소성(可塑性ㆍPlasticity)이 높다. 유연성은 뇌세포가 새로운 것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를 뜻한다. 외국어를 배울 때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빨리 익숙해지는 게 뇌세포의 유연성이 더 좋기 때문이다. 가소성은 뇌세포가 어떤 것을 학습하고 나면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전보다 더 잘 반응하는 성질을 말한다. 자전거 타는 방법을 한번 익히면 다음에 탈 때는 좀 더 잘 타게 되는 것이 뇌세포의 가소성 덕분이다.

뇌세포들은 시냅스라고 불리는 미세한 간격을 사이에 두고 배열돼 있다. 시냅스에선 뇌세포들이 분비한 화학물질들이 수없이 오가며 한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생리 기능이나 인지기능에 필요한 다양한 신호를 전달한다. 과학자들은 시냅스의 신호 전달이 활발하게 일어날수록 뇌세포의 유연성과 가소성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어린이 뇌의 시냅스는 어른보다 왕성하게 활동한다.

승부차기에서 득점 기회를 놓친 어린 선수의 뇌세포는 패배의 순간을 기억에 새겼을 것이다. 심판 판정에 대한 억울함도 분명 기억에 저장됐을 터다. 하지만 이들 기억은 금방 밀려났다. 기념품을 받아 들고 격려와 칭찬을 듣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최선을 다해 경기를 마치면 뿌듯함과 재미가 뒤따라온다는 새로운 배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뇌세포의 유연성 덕택에 아이는 자연스럽게 경기 결과에 승복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줄 알게 됐다.

네 차례 경기 내내 선수들은 각자의 포지션을 지켜냈다. 이리저리 구르는 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감독이 외치는 지시와 규칙에 귀를 기울였다. 결과가 이겼든 졌든 상대팀이 좋았든 싫었든 종료 호각소리가 울리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렬로 서서 상대 선수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훈련과 경기를 반복하는 동안 아이들의 뇌엔 이런 질서가 자연스레 기억됐다. 가소성 높은 어린 뇌세포는 반복 학습한 질서를 습관처럼 몸에 배게 만들었다.

동메달이 확정된 상대팀이 환호하는 동안 우리 팀은 어깨동무를 했다. 아이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한 키커를 원망하기 보다 다독였다. 타인을 이해하고 실패를 받아들이고 질서에 따르는 것, 영어단어 외우거나 수학 문제 풀면서는 배울 수 없다. 사커맘이 되길 참 잘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