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간 박스오피스 1위 차지
휴대폰 공개 게임을 벌이다가
40년 지기들의 본모습 드러나
“인간의 다중성을 보면서
위안 얻는다면 더 바랄게 없어요”
2시간 동안 배꼽 잡고 웃다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신나게 불구경을 했는데 알고 보니 불타는 그 집이 내 집이었다는 각성 같은 느낌이랄까. 블랙코미디 영화 ‘완벽한 타인’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 “올해 최고의 공포 스릴러”라는 우스개 섞인 호평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 영화는 거센 입소문을 타며 13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점령했다. 13일까지 관객 수는 362만명(영화진흥위원회). 덕분에 비수기 극장가도 제법 북적거렸다.
‘완벽한 타인’은 40년 지기 친구들이 부부동반 저녁 자리에서 휴대폰 통화ㆍ문자 메시지 공개 게임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휴대폰 벨이 울릴 때마다 하나씩 드러나는 비밀은 부부 관계와 우정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왁자지껄한 소동 끝에 마주하는 삶의 아이러니는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재규(48) 감독은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호응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원작은 국내엔 개봉하지 않은 이탈리아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 이 감독은 애초 한국판 리메이크의 제작을 맡기로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연출에 욕심이 났다. 당시 준비 중이던 드라마와 영화를 미루고 결국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인간의 다중성을 다룬다는 점에 끌렸다”며 “꼭 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엔 인간의 다중성을 은유하는 여러 상징이 등장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월식, 바닷물과 민물이 섞인 속초 영랑호, 여기에 수더분한 연기로 정평이 난 유해진은 가부장적인 변호사로, 뜨거운 배우 조진웅은 차가운 의사로, 엘리트 이서진은 다혈질 바람둥이로, 기존 이미지를 묘하게 뒤튼 캐스팅까지. 이 감독은 “배우와 배역 사이 적당한 간극이 빚어내는 신선함을 의도했다”며 배우들의 호연에 고마워했다.
사건이 한정된 공간에서 오로지 ‘말’로만 전개되는데도 단조롭지 않다.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기까지 해서 연극을 보는 듯도 하다. “관객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없잖아요. 현장감을 주려고 카메라 앵글은 작위적인 연출을 최소화했고, 배우들은 대사를 완전히 자기화했어요.”
휴대폰 공개 게임을 실제로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감독은 “미술 스태프가 어느 술자리에서 실제로 해 봤는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며 껄껄 웃었다. “영화는 영화로만 봐 주세요. 괜히 싸우지 마시고요(웃음). 관객들이 주인공들을 보면서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문제가 있고 이게 사람 사는 모습이구나, 웃으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 감독은 ‘늦깎이 영화인’이다. 2014년 영화 ‘역린’으로 데뷔해 4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내놨다. 그 이전엔 방송가에서 ‘폐인 제조기’로 불리던 드라마 PD였다. MBC ‘다모’(2003)와 ‘베토벤 바이러스’(2008), ‘더킹 투하츠’(2012) 등 ‘폐인’급 열혈 시청자를 양산한 명작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는 “드라마 연출 15년이 넘어가자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에 염증을 느꼈다”며 “더 늦기 전에 영화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영화로 넘어온 뒤로 연출료가 5분의 1로 줄었어요. 그래도 영화가 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7년간 영화계에서 비비고 있다 보니 이제는 드라마에도 다시 흥미가 생겨요.”
2015년 제작사 필름몬스터를 세운 이 감독은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고, 제작과 연출을 겸하고 있다. ‘완벽한 타인’ 이후엔 OCN ‘트랩’의 제작자로 나선다. 영화 ‘백야행’(2010)의 박신우 감독이 연출하는 드라마다. 과거엔 드라마와 영화가 서로에게 배타적이었으나 요즘엔 경계선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이 감독 같은 선구적인 연출자 덕분이다. 이 감독은 차기작으로 첩보 액션 영화와 고등학교 배경 좀비 드라마를 동시에 준비 중이다. “영화와 드라마가 서로 닮아 가고 있다고 봅니다. 접근법도 비슷하고요. 저희 제작사에서도 드라마 연출자 두 분이 영화를 기획하고 있어요. 이런 기회를 더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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