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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위험 알아도 살 수밖에…” 빈자들의 마지막 보금자리 쪽방ㆍ고시원ㆍ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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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위험 알아도 살 수밖에…” 빈자들의 마지막 보금자리 쪽방ㆍ고시원ㆍ달방

입력
2018.11.12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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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시원 화재’ 생존자들 일부는 스프링클러도 없는 곳으로 이사 

11일 오전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종로구 국일고시원 앞에 시민들의 추모 꽃이 놓여 있다. 2018.11.11 xyz@yna.co.kr/2018-11-11 10:16:41 연합뉴스
11일 오전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종로구 국일고시원 앞에 시민들의 추모 꽃이 놓여 있다. 2018.11.11 xyz@yna.co.kr/2018-11-11 10:16:41 연합뉴스

“노숙자로 전락하기 바로 직전 단계가 고시원살이라는데, 징글징글해도 어쩔 수 없죠.”

30년 전만해도 유흥업소를 운영했다는 홍모(58)씨가 월세 35만원짜리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일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긴 건 4년 전.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재기에 실패한 후 가족과 떨어져 오피스텔에서 지냈지만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이곳까지 밀려난 것이다. 9일 화재 당시 가까스로 대피한 홍씨는 11일 “여기 고시원 사람들은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가 대부분”이라며 “불이 났을 때도 짐이 없어 자기 몸뚱이만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실제 이날 거처를 옮기기 위해 국일고시원을 다시 찾은 생존자들의 이삿짐은 베개와 이불, 옷가지 한두 벌이 전부였다. 고시원 홍씨가 새로 찾은 보금자리는 다시 인근 고시원이다. 그곳 역시 화재로부터 안전하다고 담보할 수 없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 생존자들이 옮긴 고시원 일부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는 등 화재에 취약한 것으로 전해졌다.

6년간 영등포 일대 고시원을 전전했던 이종대(61)씨는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한 집에 살면 죄가 된다”고 말했다. 싼 만큼 안전에 취약한 고시원은 불이 나면 쉽게 목숨을 잃어,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는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올 초 돈의동 쪽방 화재(1명 사망), 종로5가 서울장여관 화재(6명 사망)에 이어 9일 관수동 국일고시원 화재(7명 사망)까지. 빈자(貧者)들의 마지막 보금자리인 쪽방, 달방(보증금 없는 여관 셋방), 고시원이 잇따라 화마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보증금 대신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사는 처지다. 이들 사건은 각각의 사연뿐 아니라 비좁은 통로에 창문 하나 없는 노후건물, 비상구도 없고 기초적인 안전시설도 없는 주거환경마저 닮았다. 가난이 던져놓은 슬픈 도시의 자화상이다.

안전과는 거리가 먼 곳을 찾는 주거빈민은 그러나 증가 추세다. 올해 국토교통부의 ‘주택 이외 거처 주거실태 조사’에 따르면, 여관 쪽방 고시원 등 비(非)주택에 사는 인구는 2016년 기준 37만가구(오피스텔 제외)다. 2005년 조사 당시 오피스텔을 포함한 비주택 거주자가 21만7,000가구던 걸 감안하면 큰 폭으로 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시원은 값싼 주거공간 수요에 사법고시 폐지 등 정책 변화와 맞물리면서 저소득근로자들의 새 보금자리로 빠르게 변모했다. 불황에 일자리가 없어 노숙 위기에 내몰린 일용직노동자와 고령노동자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끈을 부여잡으며 쪽방과 달방을 채워 나갔다.

서울역 인근 쪽방촌에 사는 이재영(56)씨는 “예전에 살던 쪽방촌에서는 난방비를 아낀다고 겨울에는 밤 10시부터 두 시간만 보일러를 틀어줬다”며 “촛불을 켜고 추위를 달래다 잠이 들어 불이 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고시원 화재처럼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소방설비가 잘 된 곳도, 아닌 곳도 존재하는데 그 차이가 천지차이”라고 했다. 고시원 화재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252건 발생했다.

이번 고시원 화재를 계기로 빈민 주거대책을 주거복지, 주거안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윤성노 전국세입자협회 주거생태계 조성팀장은 “고시원, 쪽방촌 사람들이 월세로 내는 6.6㎡당 30만원, 3.3㎡당 15만원은 33㎡짜리 원룸으로 따지면 월 150만원”이라며 “어마어마한 돈을 내면서도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도시빈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실태조사를 하고 안전과 복지 차원에서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거권네트워크ㆍ민달팽이유니온ㆍ빈곤사회연대ㆍ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19곳도 사고 다음날 화재 현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고시원 화재는) 단순 화재 사고가 아닌 구멍 뚫린 주거복지와 안전망이 부른 참사”라며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주거빈곤층의 거주시설에 대한 화재 안전점검을 실시하고 공공임대주택을 포함한 사회안전망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박동수 서울세입자협회 대표는 “가난하면 감옥의 독방보다 좁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고, 타워팰리스보다 더 비싼 면적당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고, 폭염에 그대로 노출돼야 하고,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도 못하고, 불이 나면 희생될 수밖에 없다”면서 “왜 가난한 사람은 이런 극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시는 15일부터 내년 2월까지 시내 고시원 5,840곳과 소규모 건축물 1,675곳에 대한 안전점검을 실시한다고 이날 밝혔다. 올 초 정부가 고시원 쪽방촌 8,300여곳을 점검했으나, 국일고시원은 ‘기타 사무소’로 등록된 탓에 대상에서 빠진 바 있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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