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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당신의 플란넬 셔츠

입력
2018.11.12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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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하려고 옷을 갈아입다가 낯선 향기에 잠시 멈칫 한다. 한쪽 소매만 꿰고 있는 셔츠 자락에 코를 대어 본다. 아니, 낯설지는 않다. 낯설지 않은데 오랜만이다. 이걸 무슨 냄새라고 해야 하나. 낡은 플란넬 셔츠에 얼굴을 묻는다. 오래 전부터 섬유 유연제는 쓰지 않고 있으니, 화학적 향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하루 종일 볕에 달궈져 바삭하고 폭신해진 목화솜 이불깃에서 나던 냄새가 코끝에 느껴진다. 잘 마른 빨래를 빨랫줄에서 걷자마자 맡을 수 있던 바로 그 냄새.

얼마 만에 맡아 보는 냄새인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햇빛과 바람의 냄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고 바람이 드나드는 베란다에 빨래를 널 수 있어 경험하게 되는 작은 감동이다. 그것 말고도 이사 와서 며칠 동안 아침마다 붉고 푸른 나무들이 흩어져있는 공원과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는 주차장을 저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확연히 달라진 시야의 차이를 누렸다.

얼마 전까지 나는 서울 강북에 있는 빌라 거주자였다. 친구 하나는 내가 미련 곰탱이라서 그런 집에서 살았다는 평을 했지만,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집이었다.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내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빌라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서 집을 보러 다니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확 트인 거실에 마음이 끌렸다. 조선시대 왕후의 능이 집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창문을 열면 제법 숲다운 숲이 보였고, 1층이기 때문에 뒷마당이라 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어서도 좋았다. 그러나 어느 집이든 살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불편들이 예상보다 좀 많았다.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뒷마당에서는 쥐와 벌레가 출몰했고, 하루 종일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으며, 벌써 오래 전에 집장사가 날림으로 지은 건물이라 어떤 해결책을 적용해도 물이 새는 것을 완전히 잡을 수 없었다.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토록 꺼리던 전세 대출도 받았다. 물론 전세를 얻든 집을 사든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음을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서, 가난한 이들은 대체로 어디에서도 빚을 얻지 못하고, 또한 어디에서도 빚을 내지 못하는 한 늘 가난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그런 흐름이나 이치 속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 속에 깊이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썩어가는 마루와 곰팡이가 번져가는 벽에 시달렸으나, 그런 불편들이 같은 빌라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기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껏 몰랐던 삶을 슬쩍 엿보기도 했고, 몇몇 사람과는 짧지만 실속 있는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 어쨌든 누구도 다른 사람의 복합적이고 미세한 불편이나 그것에서 비롯된 경험들을 ‘가난’ 이나 ‘거지’라는 말로 납작하게 규정할 자격은 없다. 마찬가지로 안전하고 청결한 환경을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칠 자격도, 목적이 모호한 동정과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자격도 없다.

햇빛과 바람의 냄새가 밴 푸른색 플란넬 셔츠의 단추를 잠근다. 유효 기간은 있으나 한동안 나는 이 냄새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기쁘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이사 오던 날, 짐이 다 빠진 빈 집 벽들을 둘러보며 일그러지던 다음 번 세입자의 얼굴이 이따금 떠오른다. 그가 입을 셔츠에서 날 냄새를 상상한다. 다른 사람을 가난뱅이나 거지라고 멸시할 힘이 있다면, 우선 햇빛과 바람만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스스로 애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 당신이라면, 나는 굳이 이유를 말해 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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