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김윤식의 ‘김윤식 선집’
“근대는 일차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취와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점으로 하는 인간 의지라 규정되며, 근대문학이란 그러한 이념의 문학적 전개에 해당된다. 우리의 경우 이러한 지향성은 매우 난처한 자체 내의 모순을 안고 있었는데, 반제투쟁과 반봉건투쟁이 민족의 지상과제로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성취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주목적 달성이 역사의 보편성이라면 반제ㆍ반봉건투쟁이란 한낱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이 특수성이 오히려 보편성을 침해ㆍ능가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현대 한국 지성사를 공부해온 이들이라면 위의 말이 갖는 사상적 무게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한국 현대사를 공부해온 이들도 위의 진술에 담긴 선명한 문제의식에 작지 않게 공감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언명이 사회과학자의 주장이 아닌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의 견해라는 사실이다. 그 인문학자가 바로 김윤식이다.
김윤식이 남긴 저작은 200여권에 이른다. 단독 저작만 159권에 달한다. 한 개인이 이런 규모의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매일 원고지 20매씩 쓴다고 고백한 바 있지만, 1년에 7,000여매가 넘는 글을 평생 써 온 그의 학문적 성실성에 무한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작의 양 못지않은 질을 고려해도 김윤식은 진정 뛰어난 인문학자였다. 단언컨대 그는 우리 사회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를 통틀어 한국 근대성 탐구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학자였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이를 증거한다. 자본주의와 민족국가, 그리고 반제ㆍ반봉건투쟁은 우리 근대성을 이뤄온 핵심 제도이자 운동이었다. 그의 학문적 탁월성은 소설과 평론 등 문학 텍스트들을 통해 근대성의 문학적 전개과정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깊이 있게 성찰했다는 데 있다. 이 기획에서 김윤식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한국 문학의 근대성 탐구
김윤식은 193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가르쳤다. 2001년 정년퇴임을 한 다음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가 됐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됐다. 은퇴 이후에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쳤던 그는 2018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이 길지 않은 글에서 김윤식이 일궈 온 문학 연구의 전모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그가 평생 천착해 온 한국 문학의 근대성 탐구다. 오랜 동료였던 국문학자 권영민은 말한다.
“김 교수가 자신의 수많은 저서와 평문들에서 끈질기게 다뤄온 것은 우리 문학에서 ‘근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 김 교수가 자료를 조사 정리하고 사(史)적인 맥락을 세워 나가면서 체계화한 한국 근대문학 비평은 우리 문학이 추구해온 문학적 근대성의 자기규정과 그 논리에 대한 해석이었음은 물론이다.”
이 글이 주목한 김윤식의 텍스트는 1996년에 나온 ‘김윤식 선집’이다. 이 ‘선집’은 제1권 ‘문학사상사’, 제2권 ‘소설사’, 제3권 ‘비평사’, 제4권 ‘작가론’, 제5권 ‘시인·작가론’, 제6권 ‘예술기행ㆍ에세이ㆍ연보’로 이뤄져 있다(2005년에 7권 ‘문학사와 비평’이 나왔다). ‘선집’ 이후에도 많은 저작들이 발표됐지만 문학평론가 이동하를 위시한 수제자들이 편집한 이 ‘선집’은 김윤식의 문학사상을 살펴보는 데 적절하다.
김윤식에게 한국 근대성이란 앞서 말했듯 자본주의와 민족국가 수립, 그리고 반제ㆍ반봉건투쟁으로 요약된다. 김윤식에 따르면, 개화기 이후 한국 근대문학은 이러한 근대성의 과제에 대한 반응이자 열망이자 고뇌였다. 제1권 ‘문학사상사’에서 볼 수 있듯, 김윤식은 신채호, 주요한, 김동인, 나도향, 염상섭, 이광수, 박영희, 백철, 임화, 한설야, 이기영, 김남천, 박태원, 이병기, 이태준, 김교신, 안수길, 이상, 김동리, 서정주의 문학을 주목함으로써 한국 근대문학의 근대성 모험을 분석하고 종합한다.
◇근대성의 성취와 해방
김윤식의 근대성 담론을 이루는 핵심 아이디어는 다차원성에서 찾을 수 있다. 김윤식은 임화의 주장에 따라 한국 근대성이 이식된 것이라고 파악한다. 그리고 이 근대성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가 존재했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이광수가 민족국가 건설을 중시했다면, 임화는 반제ㆍ반봉건투쟁을 우위에 뒀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근대성에 내재한 양면성이다. 그 양면성이란 근대성이 성취해야 할 목표이자 그로부터 해방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근대성의 양면성에 대한 한국 근대문학의 세 가지 대응으로 김윤식은 ‘가치중립으로서의 근대’(임화), ‘근대로서의 근대의 초극’(이상), ‘반근대로서의 근대의 초극’(김동리)을 주목한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학적 전개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김윤식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 ‘임화 연구’, ‘이상 연구’, ‘김동리와 그의 시대’ 등 역작들을 내놓았다. 김윤식은 근대성 탐구가 완료된 게 아님을 미학자 게오르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빌어 말한다.
“우리가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을 하늘의 성좌가 환히 비추어 주던 시대란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없다. 그러한 시대란 없었거나 한낱 환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 아닐까. (...) 길은 무한히 뻗어 있고, 아직도 마땅한 장비가 없다고 치자.”
김윤식의 근대성 연구가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에 던지는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지난 20세기 한국 현대사는 근대성을 성취하는 동시에 해방하려는 시도들로 점철돼 있었다. 광복 이전 민족 독립을 위한 준비론과 투쟁론, 광복 이후 새로운 국가와 사회 만들기로서의 산업화와 민주화 담론도 김윤식의 근대성 분석으로부터 크고 작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지난 20세기 한국 근대성이 자본주의, 국민국가, 민족주의, 전통주의의 십자 포화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는 김윤식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리고 근대성을 성취하고 해방해야 하는 게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중대한 과제라는 점도 분명하다.
김윤식의 관심이 근대성의 탐구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문학자인 동시에 문학평론가였다. 그는 개별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는 수많은 현장 비평집을 펴냈다. ‘선집’ 제4권 ‘작가론’에서 그는 김동리, 황순원, 안수길, 최인훈, 전혜린, 최일남, 이청준, 김승옥, 이문구, 오정희, 이제하, 김원일, 조세희, 윤후명, 박완서, 서영은, 김채원, 이문열, 김성동, 김원우, 강석경, 임철우, 구효서, 신경숙, 이인성, 최수철 등 한국 소설을 이끌어온 이들의 내면 풍경과 표정을 분석한다.
돌아보면 김윤식은 한국 근대성과 근대문학의 탐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일각에선 김윤식의 독창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한국 근대문학이 김윤식으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고 깊어졌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현대 지성사에서 예외적인 ‘지적 장인이자 거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성의 미래
근대성은 사회학의 핵심 연구 주제기도 하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근대성이란 16~17세기에서 시작해 지구적으로 확산된 서구 제도와 의식을 함의한다. 그 제도적 차원으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자본주의, 산업주의, 감시체제, 군사적 힘을 주목했다. 의식의 측면에선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한 계몽주의가 중요했다.
한국 근대성의 역사적 기원은 19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 근대성은 외부로부터 강제되고 이식됐다. 광복 이후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도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라는 근대성의 구현이었고, 이 근대성의 추구가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로 나타났다.
이러한 근대성에 탈근대성이 중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였다.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이 진행되면서 탈근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더하여, 계몽주의와 감시체제에 내재된 근대성의 그늘이 조명되면서 근대성으로부터의 해방이 새로운 사상적ㆍ제도적 과제로 부상했다.
김윤식이 주장하듯,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로서의 근대는 여전히 열려 있다. 가치판단의 차원에서 공정한 시장경제, 성숙한 민주주의, 연대적 개인주의, 개방적 민족주의는 성취와 해방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 한국 근대성이 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성취와 해방에서 김윤식이란 ‘지적 장인이자 거인’의 이름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이용희의 ‘일반국제정치학(상)’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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