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고시원 화재 7명 사망ㆍ11명 부상…사망자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
9일 새벽 서울 도심 한복판 고시원에서 전열기 과열로 추정되는 화재로 7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출입구 쪽 객실에서 불이 나면서 대피가 어려웠고, 초기 진화를 돕는 스프링클러도 없어 인명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 대부분은 일용직 노동자로 공사장 등에서 일하면서 홀로 기거하는 50대 이상 중·장년층 남성들로 확인됐다. 사망자 7명 중 3명이 방문 밖을 나서지도 못하고 숨졌을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화마에 당했다.
불은 이날 오전 5시 종로구 관수동 국일고시원 3층 출입구 쪽 301호에서 시작돼 3층 전체로 번지면서 3층 투숙객 상당수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소방 당국은 “화재가 출입구 쪽에서 나면서 결과적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의 대피로가 막혔다”고 말했다. 맞은편에서 가게 청소를 하다가 5시 3분쯤 119에 신고했다는 이재호(62)씨는 “멀리서도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시뻘건 불길이 3층 창문에서 쏟아져 나왔다”면서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고시원 2층 거주자인 정모(40)씨는 “대피해 건물 맞은 편에서 보니 3층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죽기살기로 뛰어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불이 난 3층에서 구사일생으로 대피한 이모(63)씨는 “비명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자 천장을 타고 불길이 쏟아져 들어왔다”며 “유독가스에 정신을 잃고 잠시 쓰러졌다가 창문 옆 에어컨 배관을 타고 간신히 빠져 나왔다”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당시 3층에는 26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사상자 18명 모두 3층 투숙객이다. 2층 투숙객들은 자력으로 모두 대피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50~70대 남성으로, 54세의 일본인 남성과 35세 남성도 포함됐다. 고시원 건물은 지상 3층·지하 1층 규모로 1층은 일반음식점, 2~3층은 고시원으로 사용됐으며, 2층에는 24명이 투숙해 있었다.
이날 화재는 301호에 거주하던 박모(72)씨가 사용하던 전열기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씨는 경찰에서 “새벽에 잠에서 깨 전기난로 전원을 켜고 화장실에 다녀온 이후 전열기에서 불이 나는 것을 봤다”며 “옷가지와 이불로 불을 끄려 했으나 주변으로 옮겨 붙어 대피했다”고 진술했다. 고시원 원장 구모(68)씨와 아들 고모(28)씨 역시 경찰에 출석해 “3층 거주자 한 명이 내려와 불이 났다며 2층 사람들을 모두 깨워 불이 난 걸 알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은 1차 감식과 목격자 진술, 폐쇄회로(CC)TV분석 등을 통해 “방화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 A씨의 실화에 무게를 뒀다.
건물에는 대피용 완강기가 있었지만, 화재가 발생한 3층이 아닌 2층에 설치돼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피에 성공한 거주자들은 비상탈출 계단 역시 문이 잠겨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관할 종로소방서 관계자는 “당황해서 완강기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화재 발생을 알리는 ‘비상벨’ 역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시원 내 나무로 된 출입문과 가구, 옷과 침구류 등 불에 취약한 물건들도 화마를 더 키웠다. 2층에 살았다는 박모(56)씨는 “고시원 벽이나 커튼 같은 것에 방염 처리가 안 돼 있다 보니 불이 금방 번진 것 같다”고 전했다.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은 점도 대규모 인명피해가 난 이유다. 이 건물은 1982년 12월 건축허가를 받고 83년 8월 사용승인을 받았지만 2007년 이전 건물에 대해서는 법상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서울시가 노후 고시원 대상으로 간이 스프링클러 설치를 지원하는 사업을 2012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상태에서 고시원 운영자가 시에 신청했지만 건물주가 동의하지 않아 설치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와 올해 초 발생한 제천ㆍ밀양 화재 참사를 계기로 실시한 정부의 국가안전대진단에서도 이 고시원은 빠졌다. ‘다중생활시설’이어서 점검 대상인 고시원은 모두 1,275곳에 달했지만 이 고시원은 ‘기타 사무소’, 즉 일반 사무실로 등록돼 있어 제외됐던 것이다. 지난 4월 정기 특별화재조사를 받긴 했지만 비상벨과 완강기 등 기본 소방설비가 갖춰져 있어 특별한 지적 사항은 나오지 않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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