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보다 실무 중시? 한숨 나오는 채용현장]
자격증 10여개 있어도 증권사 7곳중 5곳 서류단계 탈락
3개 회사 인턴 경험자 “경쟁자들은 더 철저 준비” 한탄
잇단 채용비리 소식에 “애써 경력 쌓으면 뭐하나” 토로
“답은 실무에, 경력에, 현장에 있다”는 명제는 흠잡을 구석 없는 진리다. 학벌, 자격증, 각종 입증 서류만큼 실무능력, 현장감, 경험에서 우러나는 노련미가 중요하다는 점을 반박할 논리는 드물다. 조력자의 반란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세상은 이를 명확히 증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무 중시 정서에 마냥 환호할 수 없는 이도 있다. 대한민국 취업준비생이다.
끝없는 낙방에 스펙 쌓기가 계속되는 동안 준비 기간도 늘어간다. 오로지 면접, 실무능력 평가로 채용을 결정하는 ‘블라인드 채용’ 확대가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실무능력이라고 그냥 생길 리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턴 등 ‘실무형 스펙’ 쌓기에 여념 없다. 그나마도 실력만 본다면 다행. 연일 터지는 채용 비리가 블라인드 채용 확대에 걸었던 한 줄기 희망을 부숴버리곤 한다. 대한민국 청춘이 신음하는 채용 현장은 △고스펙 평준화 △또 하나의 스펙이 된 실무능력 △블라인드 채용 확대 △채용 비리가 뒤엉킨 미로다.
◇ ‘고스펙 평준화’ 따라갈 자신 없어
좋은 일자리가 희박한 취업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원자의 ‘고(高)스펙 평준화’는 뚜렷한지 오래다. 서울 소재 사립대 재학생 김용헌(27)씨는 올해 하반기에만 모두 일곱 군데 증권사 영업직에 지원했지만, 다섯 곳에서는 서류 심사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 이력서가 초라하지도 않았다. 증권투자상담사, 펀드 투자상담사, 파생상품투자상담사, 재경 관리사, 금융투자 분석사, 재무위험관리사, CFA, 한국사 등 각종 자격증 및 시험 점수에 자산운용사 인턴 경험을 갖췄다. 스펙을 꾸준히 보태가고 있다는 그는 “경쟁자 대부분이 각종 자격증에 인턴 경험 1, 2회를 갖춘 것은 물론 좋은 학벌에, 어학 만점자도 많은 상황”이라며 “인턴, 공모전 외에도 하다못해 세계 일주, 에베레스트 등정 등 남들과 다른 경험이라도 꼭 쌓았어야 했나 싶다”고 말했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직장인과 취업준비생 각 500명씩 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지난해 말)에서 응답자의 93.9%가 과거에 비해 취업이 ‘매우’ 어려워졌다고 답했다. 취업 문턱이 높아진 이유로는 ‘지원자들의 스펙이 너무 좋아서’(54.8%)가 가장 주된 원인으로 지목됐다. ‘직원을 채용하는 회사가 워낙 적고(49.3%)’, 채용을 하더라도 ‘경력자 위주의 채용이 많다(43.6%)’는 분석도 뒤를 이었다. 취업 준비 과정에서 가장 힘든 부분을 묻는 질문에도 ‘스펙 쌓기’(40.1%)와 ‘정신적 스트레스(40.1%)가 1위를 차지했다.
미국 주립대 졸업을 앞둔 취업 준비생 현모(24)씨는 “CFA 자격증, 금융권 인턴 2회, 대기업인 전자회사 인턴 1회 등 각종 스펙을 쌓아나가면서도 다른 경쟁자들이 더욱더 철저하게 준비할 거란 생각이 들어 늘 불안하다”라며 “솔직히 ‘너만큼 하는 사람이 널렸는데 왜 채용해야 하느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답답한 게 요즘 심경이다”고 한탄했다.
이렇다 보니 자조 섞인 신조어도 쏟아진다. 학력, 스펙 등이 화려하지만 경제 여건이 열악한 상황을 일컫는 ‘고등거지’, 취업 의욕이 꺾였지만 주변 시선과 기대를 생각해 취업 준비 흉내만 내는 ‘쇼윈도 취준생’ 등이다. 올 초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취업준비생 73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스스로 쇼윈도 취준생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4.1%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런 시늉을 하는 이유로는 ‘상향 평준화되는 스펙을 따라갈 자신이 없어서’(32.6%)가 최상위에 올랐다. ‘취업이 너무 어려워서(31.4%)’, ‘가족, 지인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28.6%), ‘취업을 너무 당연한 일로 인식하는 분위기에 지쳐서’(27.4%)도 이유로 지목됐다.
◇ 블라인드 채용 최대장애 ‘저신뢰’
이런 치킨게임을 끝내기 위해 ‘블라인드 채용 확대’가 추진됐지만, 공공기관 및 기업의 준비 상태, 인식 및 상호 신뢰수준이 모두 턱없이 모자라 체감효과는 미미하다.
서울 소재 사립대 재학생 서모(25)씨는 올해 ‘블라인드 채용 절차’를 강조하는 각종 공사, 공단의 신규채용에 연이어 지원했다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블라인드 채용, 스펙 타파를 외치면서도 지원서류에 학교 소재지를 밝히도록 하고, 어학점수를 기재하게 하고, 자기소개서를 통해 각종 인턴 경험 및 자격 사항에 대한 사항을 써낼 수 있도록 한 경우가 많았다”며 “오히려 평가방법이 제각각이라 현재로선 방향 잡기만 어렵다는 생각”이라고 고민했다. 이공계열 대학생 손모(24)씨는 “블라인드 채용이 확대된다고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기업에 지망하는 이공계 취준생들에게는 기사자격증이 필수조건이 되는 실정”이라고 보탰다.
실력을 중시하는 블라인드 채용확대는 바람직하나 채용 경쟁이 워낙 심화한 상태인지라, ‘기회의 확대’보다는 ‘불확실성의 증가’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강하다는 얘기다. 여기에 공공 민간부문을 가리지 않고 연일 터져 나오는 채용 비리 소식이 한숨을 더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라도 일자리를 늘리고, 블라인드 채용을 확대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하지만, 지금처럼 지표를 끌어올리겠다며 재정으로 단기 일자리를 만드는 식의 접근법으로는 현 국면을 풀어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채용의 결과가 공정하다는 기본신뢰가 무너진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직무, 실무 중심의 채용’ 등은 모두 무색한 시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수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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