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이 전하는 신성일과의 추억 
4일 세상을 떠난 배우 신성일씨.

배우 신성일씨에게는 영화가 삶의 전부였고 삶이 곧 영화였다. 4일 세상을 떠난 신씨의 81년 인생에 동반자이자 친우로, 때로는 조력자로 함께했던 지인들이 전하는 신씨와의 추억은 ‘영화’라는 한 단어로 꿰어졌다. 4, 5일 서울아산병원 빈소에서, 혹은 전화로 만난 이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에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씨와 동갑내기 친구인 정진우 감독은 신씨 인생의 결정적 장면을 연출한 사람이다. 정 감독의 영화 ‘배신’(1964)에서 신씨와 엄앵란씨가 사랑에 빠졌다. 1963년 늦가을 어느 날 신씨가 2시간가량 촬영에 늦었다. 단단히 화가 난 정 감독은 “기합을 주는 의미로” 시나리오에 없던 한강 입수 장면을 신씨에게 요구했다. 신씨는 자존심이 상했다. 영화계 선배였던 엄씨는 그날 저녁 촬영장 인근 호텔 워커힐에 후배 신씨를 데려가 저녁을 사주며 격려했다. 사흘 뒤 청평호에서 촬영이 이어졌다. 배우가 탄 보트를 호수 한가운데 띄워놓고 카메라는 멀리서 촬영했다. 신씨가 엄씨에게 키스를 했다. 시나리오에 없던 장면이었다. 이듬해 두 사람은 워커힐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신씨는 ‘영화배우’라는 타이틀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여겼다. 연예인을 ‘딴따라’라 비하하는 시선에 단호히 맞서며 “영화는 종합예술”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런 그의 면모를 현역 최고령 방송인 송해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신씨는 CF도 안 하려고 했다. 영화인은 영화에만 나와야지, 자주 눈에 보이면 연기도 못 따라가고 대중의 기대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옳은 일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가 촬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겪을 때 신씨가 나서서 도왔다. 배우 김수미씨는 “신인 시절 한 영화 촬영장에서 감독이 예정에 없던 노출을 요구했다. 당시 감독의 말은 법이었다. 막 결혼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신씨가 도와 줬다”고 한 방송에서 이야기했다.

최근까지 신씨와 새 영화를 준비했던 이장호 감독은 신씨를 ‘독서광’으로 기억했다. 이 감독의 데뷔작이자 신씨의 대표작인 ‘별들의 고향’(1974)은 최인호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 감독은 “신씨는 책을 주제로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라고 했다.

신씨는 병세가 악화되기 전 전남 화순군의 한 요양병원에서 지냈다. 입원 환자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면서 정기적으로 영화 상영회도 열었다고 한다. 이 감독은 “신씨가 한창 활동할 때 너무 바빠서 개봉하고도 못 본 작품이 많았는데 입원해 있는 동안 그 영화들을 처음 보게 돼 무척 즐거워했다”고 전했다.

신씨와 1960년대 영화계를 양분했던 배우 신영균씨는 투병 중이던 신씨에게 제주도 이주를 권했다. 자신이 주주인 제주방송에서 프로그램도 만들고 공기 좋은 곳에서 폐암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신씨가 끝내 제주에는 오지 못하고 떠났다”며 슬퍼했다.

‘만추’(1966)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이었고 더빙 성우로 활동하며 신씨와 가까이 지낸 배우 양택조씨는 “신씨는 여러 배우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며 “열악한 영화 현장이 이렇게 발전하게 된 데는 신씨의 기여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사생활은 그렇게 건전하지 않았다”며 “형수(엄앵란)를 생각하면 신씨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고 애정과 원망이 뒤섞인 소회를 털어놓았다.

신씨의 삶은 후배 영화인에게도 귀감이 됐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이 영화의 조내관 역에 신씨 캐스팅을 고민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여러 사정상 출연 제안을 하지 못했지만,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신씨가 조내관 역을 거론하면서 “우리 원로들도 잘 할 수 있다”고 얘기해 감탄했다. 원 대표는 “생의 마지막까지 현역이기를 꿈꾼 선배 영화인의 모습을 오래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 생활을 같이 한 정치인들은 5일 신씨의 빈소를 찾아 “신씨가 의정 생활을 성실하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는 “고인을 보면 ‘천의무봉’이라는 말이 생각난다”며 “꾸밈 없고, 거리낌 없고,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정병국 바른미래당 의원은 “고인은 누구보다 자신의 주관과 원칙을 가진 분이었다”며 “그 순수성이 이 사회에 잘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중요한 역할을 더 많이 하실 수 있는 분인데 갑자기 떠나서 가슴 아프다”고 비통해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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