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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어번역기] 모순의 문서, ‘합의문’ 독해하기

입력
2018.11.05 17:01
수정
2018.11.0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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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청와대 본관에서 처음 열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모두 발언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문 대통령,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5일 청와대 본관에서 처음 열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모두 발언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문 대통령,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치판에서 참 아이러니한 문서 중 하나는 ‘합의문’이다. 이름은 합의문이라 속 시원한 어감을 갖고 있지만 이것만큼 허망한 문서도 없다. 실은 합의하지 못한 것을 정치 수사와 한 데 섞어 놓은 총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사 하나에도 참석한 진영 간에 밀고 당기는 기싸움이 녹아있다.

그래서 합의문에 서명해놓고도 논쟁은 계속된다. 심지어 논란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5년 19대 국회의 ‘공무원연금 개혁’ 논란 때는 여야가 합의문의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을 50%로 한다’는 문구를 놓고 한쪽(당시 새누리당)은 목표치로, 다른 한쪽(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인상을 명시한 것으로 해석해 ‘합의 후폭풍’이 일었다. 물론 여야가 서명, 합의한 문서의 내용이다.

합의문 중에서도 끝판왕은 어미다. 어미에는 합의문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어미에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미에 주의해서 읽으면 합의문의 실현 가능성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5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처음 열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도 회의 뒤 합의문을 내놨다. 문 대통령이 취임 이후 내내 국회를 설득하고 공을 들인 상설 협치 기구이니 사전에 물밑 조율을 거쳐 합의문의 얼개는 미리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이 합의문을 예로 들어 어미를 살펴보자. 전문은 기사 맨 아래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첫 회의에 앞서 여야 5당 원내대표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병완 민주평화당 원내대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문 대통령,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첫 회의에 앞서 여야 5당 원내대표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병완 민주평화당 원내대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문 대통령,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1등급

“~내년도 예산안 심의에서 적극 반영한다.”

합의문 4항의 지방분권과 지역 활력 제고에 관한 합의 내용이 이 합의문에선 최고봉이다. 목적어와 시한이 명시돼있기 때문이다. 참석 주체들 간에 별다른 이의가 없는 사안일수록 어미가 구체적이기 마련이다.

#2등급

“신속히 논의하여 처리하기로 한다.”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는 법. 여야 간 분위기가 좋을 때는 문제가 안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신속히’라는 문구를 놓고도 서로 해석이 달라 ‘2라운드’를 시작하기도 한다.

“~를 위한 입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한다.”, “~ 위해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등 보완 입법 조치를 마무리한다.”

‘개선을 추진하기로 한다’, ‘마무리 한다’라고만 돼있을 뿐 언제까지 개선하고, 마무리하겠다는 시한이 없으므로 특정 정당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무용지물. 보통 합의문 발표 후 회견에서 기자들이 물으면, 찬성하는 쪽은 “이번 정기국회 내에 처리를 목표로”라고 답하는 반면 반대하는 쪽은 “그건 여당(혹은 야당)의 생각이고…”라고 얼버무리는 경우도 많다.

#3등급

“~ 논의하고, ~ 협력한다.”

‘추진’도 아니고, ‘처리’도 아니고, ‘협력한다’. 목적어도 ‘선거연령 인하를 논의하고’,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로 모호하다. 논의는 정치권에서 늘 하는 일이다. 선거연령 하향 조정 법안 만해도 지난해 국회 안전행정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지만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의 반대로 상임위 통과가 무산됐다. 지난해 6월 국회 원내 교섭단체 대표 회동에선 ‘추경은 계속 논의한다’는 문구 하나를 놓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넣기를 원했으나 자유한국당은 반대해 수일을 끌었다. 결국 이 문구를 빼기로 하면서 간신히 여야가 합의문에 서명했다. ‘협력한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

“개정에 노력하기로 한다.”

아마 개정 방향에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찾았다면 ‘정기국회 내에 무슨 무슨 개정안을 처리한다’라고 적었을 것이다. 합의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특정 정당이 우리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혹은 지지층에 보여주고자 명시하기를 원할 때, 그리고 그에 동의하는 정당이 절반 이상은 될 때 보통 이런 표현을 써서 합의문에 명시한다.

#그래서 합의문의 고갱이는…?

합의문을 보니 ‘초당’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등장했다. “초당적”, “초당적으로”란 문구가 반복된다. 문 대통령은 물론 여야 모두 ‘협치를 시작했다’는 것을 국민에게 선언하고 싶은 의도가 깔려있다.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첫 회의에서 참석자 모두가 이것만은 말끔히 합의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참고-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1차 회의 합의문

『정부와 여야는 경제·민생 상황이 엄중하다는 공통된 인식 아래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과 예산에 초당적으로 협력한다.

생산적 협치를 위해 오늘 공식적으로 출범한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는 다음과 같이 합의하고 국민에게 초당적 실천을 약속한다.

1. 소상공인과 자영업,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법안처리 및 예산 반영 등 모든 방안을 강구한다

2. 채용공정 실현과 노사 상생을 통한 경제활성화를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한다.

취업비리 근절을 통해 채용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한 입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한다.

기업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등 보완 입법 조치를 마무리한다.

일자리 창출과 노사 간 새 협력 모델인 광주형 일자리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초당적으로 지원한다.

3. 경제 활력을 위한 규제혁신을 신속히 추진하기로 한다.

정보통신융합법, 산업융합촉진법, 지역특구법을 여야 합의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추가적인 규제혁신 관련법 및 신산업 육성을 지원하는 법(4차산업혁명 관련법 등)의 처리를 적극 추진한다

4. 지방분권과 지역 활력을 제고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한다.

중앙기관의 행정과 사무를 지방으로 일괄 이양하는 법안과 재정 분권을 뒷받침하는 법안에 대해 신속히 논의하여 처리하기로 한다.

지방과 수도권의 상생과 발전, 국가균형발전, 지역주도형 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고 국회의 내년도 예산안 심의에서 적극 반영한다.

5.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국회가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불법 촬영·유포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 강서 PC방 사건 대책 후속입법, 음주운전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 등을 공동으로 추진한다.

6.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법안과 예산을 초당적으로 처리하기로 한다.

출산과 육아를 지원하는 예산을 확대하며 수혜 대상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아동수당법을 신속히 개정하기로 한다.

7. 불공정을 시정하고 공정경제의 제도적 틀을 마련한다.

이를 위해 상법 등 관련법의 개정에 노력하기로 한다

8.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한다.

한미 간 튼튼한 동맹과 공조 속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구축에 초당적으로 협력한다.

국회 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위한 여건 조성을 위해 노력한다.

9. 선거연령 18세 인하를 논의하고 대표성과 비례성을 확대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협력한다.

10.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하다는데 공감하고 방송법 개정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11.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기초로 원전 기술력과 원전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12. 위와 같은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의 합의사항 이행을 위해 국회에서 실무적 논의를 적극 추진한다.

2018년 11월 5일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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