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선생님을 뵌 건 지난해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책자에 실릴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서울 만리동 고개에 있는 자그마한 거처였다. 먼발치에서 바라봤던 분을 가까이 대면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만으로도 떨리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인터뷰는 6월에 두 번에 걸쳐, 8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팔순의 연세셨지만 꽤 긴 시간 동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영화 인생을 회고하셨다.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대단했다. 반 세기에 걸친 삼국지 같은 이야기였고, 때론 조금은 과장된 무용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정리하고 배우론을 쓰면서, 그 과정에서 1960~70년대 자료들을 뒤지면서, 오히려 인터뷰어 앞에서 많이 자제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황금기 시절 한국영화 그 자체였던 존재였다.
신성일이라는 배우가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최초로 스타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이다. 한국영화가 아직 산업적으로 불안하던 시절, 엄앵란과 함께 이른바 ‘신-엄 콤비’를 이루며 만들어낸 청춘영화는 배우와 장르가 결합된 흥행 공식이었다. 이후 ‘영화배우’라는 호칭은 ‘스타’로 바뀌었고 그 시작은 바로 ‘맨발의 청춘’(1964)의 신성일이었다. 그는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며, 김승호 김진규 신영균 등 선배 세대 배우들과 차별화된 신세대적 매력과 패셔니스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독보적인 외모가 타고난 것이라면, 섹슈얼하면서도 저항적인 이미지는 스스로 구축한 것이었다. 이것은 세계적인 트렌드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에 제임스 딘과 폴 뉴먼, 일본에 이시하라 유지로, 프랑스에 알랭 들롱이 있었다면 충무로엔 신성일이 있었던 셈이다.
한국영화 산업이 상승곡선을 그리던 시기는 정확히 신성일의 전성기와 겹친다. 통계는 이를 증명하는데, 정점에 올랐던 1967년에 그는 4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한국영화 10편 중 4편에 등장한 셈이며, 거의 매주 신성일의 영화가 개봉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설이나 추석 대목엔 그의 신작이 두 편 이상 극장에 걸려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1964년 ‘맨발의 청춘’부터 1971년까지 유지되었는데, 324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이것은 이 시기 한국영화 전체의 27%에 해당한다.
청춘영화가 ‘배우 신성일’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욕망에 들뜬 젊은이에서 허무주의와 위기감과 퇴폐미를 지닌 남성으로 변해간다. 김수용의 ‘안개’(1967)나 이만희의 ‘휴일’(1968)이나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1968)에 이르면 그는 어느새 시대와 역사의 피로와 불안을 대변하는 얼굴이 된다. 여기서 놀라운 건 활동 기간이다. 그의 대중적 호소력은 한국영화가 침체기를 걷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여전했다. ‘별들의 고향’(1974ㆍ감독 이장호)이나 ‘겨울 여자’(1977ㆍ감독 김호선) 같은 흥행작에서 그는 여전히 누군가의 연인이었으며, 연민을 느끼게 하는 지식인 중년 남자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장남’(1985ㆍ감독 이두용)이나 ‘길소뜸’(1986ㆍ감독 임권택)에 이르면 지천명의 나이에 다다른 연기자의 연륜을 보여준다. 30년 넘게 주인공이었던 스타. 이후 그는 1990년대는 물론 21세기에도 배우로서 카메라 앞에 섰다.
회고전 준비를 하던 시기, 선생님은 자신이 폐암 3기라는 걸 아셨지만 의연하셨다. 가끔씩 문안 전화를 드릴 때도, 점점 건강해지고 있으시다며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지난해 가을 회고전 때도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모든 일정을 소화하셨다. 그 마지막은 ‘휴일’ 상영 후의 ‘관객과의 대화’. 그때의 한 마디가 귓가를 맴돈다. 늦은 밤 극장을 나와 숙소로 가시기 전, 선생님은 조금은 피곤한 표정으로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정말 할 만큼 다 했어.” 어쩌면 이 한 마디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요약하는 독백 아니었을까? 507편의 주연 작품을 통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세상을 떠난 배우 신성일. 그는 한국영화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스타’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형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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