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가장 큰 별이 떨어졌다. 20세기 후반 한국영화의 대명사였던 영화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전남대병원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고인은 한국영화 99년 역사에서 첫손에 꼽힐 스타다. 출연작은 600여 편에 이른다. 507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복판에 있었고, 1970~1980년대 한국영화의 쇠퇴를 지켜봤다. 충무로가 부침을 겪어도 그는 언제나 일급 스타였다. 대표작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신필름 신인 배우 오디션을 통해 충무로에 발을 디뎠다. 오디션에 원서를 쓰지 않고 오디션장에 구경 갔다가 당시 충무로를 호령하던 신상옥 감독의 동료 이형표 기술감독의 눈에 띄어 오디션을 본 후 신 감독에게 바로 발탁됐다. 오디션 경쟁률은 5,098대1이었다. 한국영화계를 뒤흔들 이름 ‘신성일’은 이때 생겼다. 신 감독은 ‘뉴 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고인에게 지어줬다. 1960년 신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은막에 데뷔했다. 대가족 속의 고등학생 막내아들 역할이었다. 훗날 배우자가 되는 당시 최고의 청춘스타 엄앵란씨와 이 작품으로 첫 대면을 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조각도로 다듬은 듯한 얼굴이 단번에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고인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어 엄씨가 자신과 함께 연기할 때는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연산군’(1961) 등을 거치며 연기이력을 쌓아가던 고인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에서 밀수 일을 하는 폭력배 서두수를 연기하며 당대 청춘의 상징이 됐다. 실업이 넘치고 전쟁의 상흔을 채 못 벗은 시기, 불우한 사회계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위기에 처한 상류층 여인 요안나(엄앵란)를 구해준 후 그녀와 사랑에 빠지나 비극적 최후를 맞는 모습에 대중은 눈물을 흘렸다. 고인은 ‘맨발의 청춘’ 촬영 즈음 상대배우 엄앵란씨와 스크린 밖에서도 사랑에 빠졌고,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64년 고인이 주연한 영화는 ‘맨발의 청춘’을 포함해 32편. 그나마 이는 적은 편이다. 고인은 전성기 때 1년에 40~50편씩 영화에 출연했다. ‘날개’ ‘만추’ ‘안개’ ‘군번 없는 용사’ ‘겨울여자’ ‘내시’ ‘길소뜸’이 그의 대표작 중에 대표작으로 꼽힌다.
연기를 넘어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한국배우협회 회장,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을 역임했다.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1989년 성일씨네마트를 설립하고 ‘코리안 커넥션’ 등을 제작했다. 정치권에서도 활약했다. 대중문화인, 특히 영화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서는 영화인의 정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였다. 여의도 문을 세 번두드린 끝에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치료에 전념해왔다. 투병 중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발휘해 차기작 출연 의사를 강하게 밝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 초청됐고, 건강한 모습으로 행사를 소화해 건강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지난달 열린 부산영화제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1990), 아시아영화제 남우조연상(1980)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엄앵란씨와 아들 석현, 딸 수화ㆍ경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은 6일,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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