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광양 장도 박물관' 박종군 장도장
부친 이어 74년째 가업 이어
장도 하나 만드는 데 177개 공정
1만번 망치질 거쳐 탄생하는 공예품
김영란법 후폭풍에 주문 뚝 끊겨
수익 프로그램 돌려도 적자 눈덩이
장사 방식 변해도 '一片心' 가치 고수
“지금 제 상황이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칼날도, 제 마음도 벼리고 또 벼립니다. 망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니까요.”
박종군(56) 장도장(粧刀匠ㆍ국가무형문화유산 제60호)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최근 장사가 안 돼 처지가 곤궁해졌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던 터라, “아이고, 죽겠다”는 푸념이 먼저 튀어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칼(장도)의 다짐’을 되뇌었다. 작업장 조명 불빛을 받아 서늘한 은빛을 발하는 장도의 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선 결기와 고뇌가 무겁게 다가왔다. 하기야 40년 전 장도 명장이었던 아버지(박용기ㆍ2014년 작고 당시 83세)의 뒤를 잇겠다며 ‘장도(壯途)’에 나선 그였으니, 더 말해 뭐할까. 그는 스스로도 “장도장의 길을 걷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숙명이었다”고 했다.
‘철(鐵)의 고장’인 전남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광양장도장전수관ㆍ박물관. 전국 유일의 장도 박물관인 이 곳 주인(관장)은 광양 토박이인 박 장도장이다. 그의 말을 옮기자면 이곳은 열네 살 때 장도에 입문한 아버지의 스승이 점방(공방)을 열어 장도를 만들어 팔던 곳이었고, 1948년 그 스승이 세상을 뜬 지 27년 만에 아버지도 스승을 좇아 이곳에 공방을 열었단다. 말하자면 대를 이은 ‘장도 점방’이었다. 그랬던 게 지금의 번듯한 박물관으로 변신한 건 2006년 1월이다. 여기에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아버지 때의 시스템으로는 업(業)을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죠. 예능 분야와 달리 공예 분야에선 도제식 교육 전통이 먹히질 않아요. 외려 스승이 제자에게 월급을 주고 기술을 가르칩니다. 나중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제자들이 늙은 스승을 버리고 제 사리사욕만 챙기더라고요. 그러니 공방이 버텨낼 재간이 있습니까? 빚이 재산이 되더라고요.”
물욕 앞에서 사제 관계가 노사 관계처럼 되면서 박 장도장의 아버지는 직공(職工)들의 월급을 대느라 늘 빚을 달고 살았다. 하여, 박 장도장은 점방을 비롯한 땅과 아버지가 평생 만들어온 장도 작품들을 기부채납하는 대신 정부와 광양시 등의 지원을 받아 전수관을 짓기로 했다. 그는 “직공들에게서 단순히 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장도가 지닌 굳은 절개의 정신을 입힌다는 사명감 같은 걸 기대하기 힘들었다”며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칼을 만드는 기술자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이들과 대를 이은 업을 같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 장도장의 부인과 두 아들이 이수자와 국비 전수장학생 자격으로 가업을 돕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기운 가세를 되살려 보겠다는 욕심도 적지 않았다. “무형문화재 보유자는 밥도 안 먹고 산답니까? 정치도 장사 아닙니까? (웃음)” 그는 박물관을 위탁 받아 운영하면서 장도 제작 체험 및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장도 판매장을 개설하는 등 수익프로그램도 돌렸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말이 좋아 박물관이고 판매장이지,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 속은 “개털이었다.” 객(客)이 찾아와서 장도를 사가는 건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박 장도장은 “겉만 번드레하지, 빛 좋은 개살구”라고 넋두리를 했다. 지금도 광양시가 지원하는 연간 운영비(8,500만원)로는 직원 5명의 월급을 주기도 빠듯하다. “그 어렵다던 IMF 때도 버텼죠. 그 땐 차라리 일을 안 하면 됐으니까 인건비라도 줄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잖아요. 지금 빚이 얼마나 되냐고요? 말을 안 할랍니다.” 깊은 한숨을 몰아 쉬던 박 장도장은 어느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전통 장인들의 영세성은 그렇다 쳐도, 산 입에 거미줄이라도 치지 않으려면 시대 변화에 맞춰 상품을 개발하고 투자도 해야 하는 게 장사의 이치일 터. 박 장도장, 아니 그의 아버지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박 장도장은 담배를 비벼 끄더니 “안 해 본 게 없다”고 했다.
이를 테면, 장도 목걸이에서 칠보장도, 캐릭터 장도, 뽕낫, 밤 깎는 장도, 저가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장도까지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나름 승부수를 띄웠다고 했다. 장도에 트렌드를 입히고 브랜딩도 하며 생활밀착형으로 상품화를 꾀했지만 시장에 안착시키지는 못했다. 장도 외길만을 걸어온 장인 부자(父子)였지만 탁월한 장사꾼의 능력까지 갖춘 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두 부자는 목돈을 투자해 푼돈만 만지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박 장도장은 “아버지나 저나 뛰어난 장사꾼은 아니었던 것”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1980년대 초반 장도가 인기를 끌 때는 있었다. 서슬 퍼런 군부정권 시절 관공서와 기업들은 선물로 장도를 단체로 구입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충절과 절개의 상징인 장도는 군인들에겐 인기 품목이었다. 이후 장도는 ‘선물용’ 등으로 명맥을 유지했고(실제 광양시는 장도 구입예산을 별도로 책정하기도 했다), 장도박물관이 들어선 뒤에도 장도장에겐 제법 먹고 살만한 ‘거리’는 됐다.
하지만 2016년 9월 이후 손해 보는 장사로 돌아섰다. 장도도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후폭풍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장도는 90%가 선물용으로 팔립니다. 그런데 김영란법이 생겼으니 어찌 됐겠습니까? 한 마디로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장도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최상의 작품을 선보이겠다는 집념에 더해, 무엇보다 ‘장도는 일편심(一片心)의 정신을 심는 일’이라는 사명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박 장도장은 고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공방에서 장도 일을 시작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가장 먼저 배웠던 건 칼을 만드는 기술이 아닌 칼에 담긴 정신이었다. 그가 만든 칼은 사람을 해치는 무사의 칼이 아닌 자신을 지키고 삿된 마음을 도려내는 칼이어야 했다. 선비문화의 정신과 가치를 담는 일이었다. 여기엔 “장도 문화의 이론을 갖추라”는 선친의 뜻도 담겼다. 박 장도장이 대학(동국대 불교미술과)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쓴 ‘한국 도검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은 그 결실이다.
박 장도장은 남다른 장사 비결이나 경영이론 등은 몰라도 그가 경험했던 숱한 실패를 통해 ‘눈앞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장사꾼의 배포 하나만큼은 두둑하게 키웠다. “비록 먹고 살기 위해 장사를 하지만 결코 이해타산만을 따지지 않습니다. 장도장은 충(忠)과 효(孝), 의(義)와 예(禮), 그리고 지조라는 정신을 장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대를 이어 74년째 업을 지속해 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만 박 장도장은 아버지의 것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허름한 작업장에서 전통 기법으로 장도를 만들더라도 마케팅 방식만큼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6년 전 온라인 쇼핑몰을 개설하고 조달청이 운영하는 국가 종합 전자조달시스템인 나라장터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영업의 ‘진화’를 택한 것이다. 다만 장도에 인간의 바른 정신과 가치를 심는다는 책임감은 버리지 않았다. 그가 제작하는 모든 장도의 도신(刀身)에 ‘일편심(一片心)’을 새겨 넣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박 장도장의 목표는 장도를 이용한 문화산업 활성화다. 아직 구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진 건 아니지만 머릿속 생각은 있다. 예컨대, 기업과의 매칭을 통해 ‘문화재 지킴 산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국가가 국내외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해 마케팅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요, 이런 문화산업이란 것이요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국민들이 은행 빚에 허덕이고, 애들 학원비 내기 바쁜데 문화로 눈을 돌릴 여유가 있겠습니까? 결국 전통 공예 문화산업이 잘 되려면 경제가 잘 돌아가야 합니다.” 그는 천생 장도장이면서 장사꾼이었다.
광양=글ㆍ사진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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