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방한 후 美 한국 압박설 커지자 정부 “어불성설”
한미 불가피한 이견에 “긴밀 협의” 반복 의구심 키워
남북 간 교류협력이 멈춰서면서 미국이 북한 비핵화 협상 진전 전까지 우리 정부에 모종의 압박을 가한 결과라는 주장이 한없이 커지고 있다. 이른바 미국의 속도조절 압박설이다. 정부는 이러한 주장이 기우에 불과하며 실제 미국이 우리 손발을 묶었다는 식의 해석은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논란이 여기까지 온 데에는 ‘긴밀한 한미 공조’라는 목표에 기계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남북관계 진전 속도를 둘러싼 불가피한 이견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관성적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이 남북관계 진전의 속도 조절을 압박했다는 주장은 지난달 28~31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을 전후해 증폭되고 있다. 비건 방한을 계기로 만들기로 합의한 한미 워킹그룹이 사실상 미측의 남북 협력 승인기구가 아니냐는 의구심도 불거졌다. 한미 공조 균열이 얼마나 심각하길래 상시 협의채널을 만드냐는 취지다. 그 외 미 재무부와 대사관이 국내 은행 및 방북 대기업을 접촉해 대북 사업 내용을 파악한 것과, 비건 대표가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보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먼저 만난 것 등도 의문을 키운 요인이었다.
하지만 정부 안팎의 설명은 정반대다. 우선 미 대사관 차원의 국내 대북협력 동향 파악은 이번 국면 이전에도 정기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것이다. 미국도 재무부 활동이 한국 내에서 부정적 반향을 일으키자 일부 접촉 약속을 급히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비건 특별대표는 우리 측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경고성 발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협력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한 외교부 관계자는 “한미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지만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며 “일방적인 압박을 위해 (미국 정부 인사가) 이렇게 드나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미국 압박설이 커진 데에는 우리 정부의 지나친 비밀주의와 소극적 태도 탓도 크다는 평가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대북제재에 완고한 미국 정부 입장 상 한미 협의에서 극적인 반전은 없었을 것”이라며 “정부가 미국에서 양해를 얻지 못했다면 미측에 협조를 구하는 대외적 제스처라도 공개했어야 ‘미국 압박에 꼼짝 못한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정치권과 비핵화 협상 진행상황을 공유하면서 판문점선언 비준을 비롯한 남북교류 협력 필요성을 설득시키지 못한 책임도 크다. 보수야당이 평양공동선언과 군사부문 합의서의 정부 단독 비준에 발끈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일방통행식 대북정책이 도를 넘었다고 공세를 퍼붓고 있는 만큼 비밀주의로만 일관해서는 비판 여론을 돌려세울 수 없다.
정부가 이번 기회에 국민 또는 정치권과의 소통 체계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한미 사이에 남북관계 개선 속도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 차가 있을 수밖에 없음에도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덮는 처사가 도리어 의구심만 키운다는 것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는 “9월 개성 남북공동 연락사무소 개소 때에도 정부는 막판까지 ‘제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원론만 반복했다”며 “협상이 진행될수록 남북미 간 세부 조율이 이뤄지고 전문 영역도 커지는 만큼 국민 눈높이에 맞춘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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