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의 핼러윈 체험기
“진짜 귀신이었으면 좋겠다. 이 사람들 다 통과하게!”
군중 속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 자고로 명언은 받아 적어야 제 맛이다. 길이 있지만 가지 못했고, 다리가 있지만 걷질 못했다. 저 앞에 두둥실 빼곡한 사람들의 머리가 워터파크 파도풀 같기도 하고, 지옥철의 계단 상황 같기도 했다. 10월 31일 오후 9시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어느 골목, ‘핼러윈’ 현장이다. (참고로 많이들 ‘할로윈’이라고 말하지만 표준맞춤법에 따른 공식 표기는 ‘핼러윈’이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원하지 않고 약간 텁텁했다.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은 탓. 그 와중에도 신기하고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분장에 눈이 휙휙 돌아갔다.
‘그렇지, 오늘은 핼러윈 체험기를 쓰기 위해 온 것. 저들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또 소름. 세상 기괴한 분장의 사람들이 말을 걸자 세상 공손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변했다. 갑자기 예의 바른 모습이 더 무서웠던(?) 사람들을 ‘분장 극과 극’ 콘셉트로 모아봤다.
◇ (기자가 발견한) 최고비용 vs. 최저비용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의사들의 모습을 재현한 김동현(22ᆞ경기도)씨는 마스크에 5만원 코트에 40만원, 총 45만원을 투자했다. 큰 돈이지만 아깝지 않다고 했다. 평소에도 취미로 코스튬플레이를 한다는 그는 그때마다 복장을 재활용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행복을 느낀다는 김씨는 기자와 헤어질 때도 코스튬 모자를 내리며 ‘신사 인사’를 했다.
한편, ‘0원’으로 모든 걸 해결한 참가자도 있었다. “해리포터(이날 기자의 분장)님, 사진 좀 찍어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도비가 있었다. 김일환(21ᆞ서울)씨는 해리포터의 ‘집요정 도비’ 분장을 위해 요정 귀를 ‘핸드 메이드’로 만들었다.
“화학공학과라 수업 때 배운 대로 3일만에 고무로 만들었어요.” 재료도 학교에 있는 것, 복장도 원래 있는 것을 사용했다는 그는 이날의 ‘가성비 왕’으로 선정됐다. (물론 이날 기자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 기준이다.)
◇ 동양 코스튬 vs. 서양 코스튬
이날 곳곳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 보였다. (저승사자, 왕, 선비, 가오나시 vs 조커, 할리퀸, 볼드모트 등등. 물론 대세는 ‘좀비’였다.) 여태껏 미국에서만 핼러윈을 즐겼다는 이예나(27ᆞ서울)씨는 한국에서의 첫 핼러윈에는 '보부상'을 선택했다. 미국에서는 주로 디즈니 공주, 유령신부 등 애니메이션 여주인공이었지만 한국에서는 가장 소박한 직군으로 변신. 30분 만에 직접 만들었다는 보따리를 털레털레 흔들며 횡보하는 모습은 군중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왕과 선비 등 같은 시대 분들을 많이 봐서 좋다”는 말에 호탕함이 느껴졌다.
레옹과 마틸다로 변신한 정서형(23ᆞ서울) 윤종민(30ᆞ서울)씨는 한달 전부터 이 콘셉트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들은 페스티벌 갈 때 쓰던 소품들을 활용해 변신에 성공했다. (장난감 총도 평소 소품?) 꼭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저 즐기고 싶다는 그들. 사진을 부탁하자 준비했던 것처럼 포즈를 취했다. 이미 커플은 핼러윈을 즐기고 있었다.
◇ (기자가 만난) 최연소 참가자 vs. 최고령 참가자
최준우(6ᆞ서울) 하영(7ᆞ서울) 남매는 최연소임에도 이태원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 와보고는 이태원에 사람이 제일 많다는 것을 깨닫고 올해도 이 곳으로 결정한 것. 처음 이태원에 나온 기자보다 핼러윈 선배였다. 베테랑답게 기존에 있는 코스튬을 활용해 준비 비용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체력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이후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대답은 간결했다. "집에 갈 거예요!"
이날 만난 최고 '어른' 이연화(58ᆞ서울)씨는 하마터면 핼러윈의 맛을 못 볼 뻔했다. 같이 온 일행의 거듭된 설득 끝에 이태원 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사실 거의 반강제였던 것. 그럼에도 이미 한 바퀴 다 돌았을 정도로 핼러윈을 만끽한 그녀는 "크리스마스보다 더 재미있다"는 소감을 밝혔다.
◇ 그리고, 기자들이 선택한 분장
올해 핼러윈 체험기를 쓰기 위해 기자들도 분장을 해야 했다. 먼저 지난 핼러윈에 사람들이 어떤 것을 했는지 검색했다. 공포 콘셉트가 아니더라도 인기 캐릭터(아이언맨, 심슨 등) 유명 인사(김정은, 트럼프 등)로 분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화려한 분장을 따라 하기에는 화장기술도 지갑사정도 여력이 되지 않을 듯 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해리포터’. 대중적인 캐릭터인 만큼 의상을 구하는 문턱이 낮아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전문 의상 대여점을 이용할 수도 있고 중고 거래도 가능했다. 해리포터의 경우 정품 의상인지, 소품이 포함되는지 여부에 따라 시세는 1~3만원 사이였다.
귀신은 자고로 얼굴은 ‘허옇고’ 눈과 입가는 ‘시뻘게야’ 한다. 분장의 순서는 이렇다. ‘얼굴만 동동 뜰 정도로 컨실러나 파운데이션을 허옇게 바른다 → 시뻘건 섀도우를 눈두덩이부터 광대 부위까지 펴 바른다 → 더 시뻘건 섀도우를 전단계보다 적은 부위에 발라 음영 효과를 준다 → 개인 기호에 맞게 마스카라나 아이라이너를 이용해 눈 크기를 키운다.’ 완성까지 약 1시간이 걸렸다.
◇ 딴 나라 명절, 핼러윈. 왜 이러냐고요?
입가에 살벌할 정도로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난 박소희(20ᆞ경기도)씨. “메이크업 전공하는 학생이죠?”라고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뇨. 국어국문학관데요.” 그렇다. ‘고퀄’ 분장의 그들은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 동안 내면에 축적됐던 무언가를 분출하듯 얼굴을 피로 뒤덮고, 입을 찢었다. 자기표현의 도구로 핼러윈을 이용하는 듯했다.
한 달, 심지어는 두 달 전부터 이 날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의상을 구매하거나 대여하고, 소품을 준비하는 모습은 연극배우들이 한편의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과 흡사했다. 이날을 위해 벼르고 벼렸던 것. 분장과 코스튬과 소품 등으로 자기의 끼를 마음껏 표출하는 모습이 능동적이고 활기차 보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핼러윈에 열광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평소에 어떻게 노냐고 질문하자 통통 튀는 분장의 그들은 “그냥 별거 안 하는데…” “그냥 맛집 다니는 거 좋아해요.” 하고 얼버무렸다. 물론 외국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이 많은 것도, 외국 문화에 접근성이 높아진 것도 핼러윈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렇게 미친 듯 즐길 만한 놀이 문화가 부족했기 때문이지는 않을까. 핼러윈 열기는 앞으로도 식지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로 한 해 한 해 거듭될 때마다 늘어나는 참가자 수만큼 뜨거운 열정을 쏟아 낼 놀이 문화도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김가현 인턴기자
김진주 인턴기자
사진=김혜윤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