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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칼럼] 사법농단과 법의 지배

입력
2018.11.01 10:19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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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속으로 양승태 대법원행정처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다. 사법 권력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에서 금번의 사법농단은 성숙한 법치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사법농단은 법의 권위와 사법정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깨트림으로써 ‘공정한 법규범 하에서의 자율적인 삶과 경쟁’을 통해 번영을 꾀하는 자유주의의 근본이념에 치명상을 가한다. 그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던 신뢰와 상호존중의 문화를 뿌리 채 뒤흔들어 아노미적 혼란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사법농단은 빈번히 발생했다. 하지만 과거의 사법농단은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1987년 민주화 이전의 사법부는 ‘사실상’ 독립적인 부서가 아니라 행정권력, 특히 전제적인 대통령에 예속된 부서였기 때문에 사법농단을 주도적으로 저지를 여지가 적었다.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 소송에서 대통령의 의중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은 판사의 직위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놔야하는 무모한 행위였다. 따라서 민주화 이전의 사법농단은 대통령과 주변 권력자들이 주도한 국정농단의 일부로 발생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법농단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독재정권 시대에 비해 사법부의 위상과 독립성이 크게 강화되어 대통령과 권력자들이 재판을 왜곡시킬 개연성이 크게 낮아진 상황에서 발생했다. 대통령이나 인사권자의 눈에 난 판결로 일부 판사들이 승진을 하지 못하거나 요직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생명의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판사직을 유지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진출하면 그만이다. 판사들이 양심과 법에 따라 판결할 수 있는 최소 요건은 갖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권력과 야합하여 왜곡된 판결을 내리거나 유도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자발적인 부정행위로,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사법농단에 해당한다.

적극적인 사법농단은 아직 성숙한 법치민주주의에 다다르지 못한 신생민주주의 국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처럼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사회가 다원화되고 있는 곳에서 발생하기 쉽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마찰을 해결하고 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법제화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사법부의 역할이 급격히 증대된다. 정당과 의회가 복잡다기한 시민사회의 이해관계들을 효과적으로 집약해내지 못한 채 교착상태에 빠지곤 하는 상황도 사법 권력의 팽창을 자극한다. 정치세력들이 정치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에 떠넘기는 현상이 적잖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나날이 신장되고 있는 개인들의 법의식과 권리의식도 사법 권력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로 집약되는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처럼 법의 지배(the rule of law)가 아직 확고히 정착되지 않은 곳에서 특별한 위험을 야기한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법조계에 뿌리 깊은 엘리트의식 및 권위주의 문화와 결합하여 ‘사법의 정치화’나 사법지배(juristocracy)로 진전되기 쉽다. 만일 양승태 대법원행정처 사법농단 의혹이 모두 진실로 밝혀진다면 법원이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져버리고 입헌민주주체제의 제도적 근간인 삼권분립을 스스로 허물어버린 셈이니 민주화 이후 사법전통에 치욕스런 오점을 남기는 것이다.

사법부의 독립은 결코 제도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책임이 담보되지 않은 독립성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입헌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에 대한 강력한 의지, 법적 정의를 구현하려는 투철한 직업윤리,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사명의식으로 무장할 때만이 사법부의 독립은 자유로운 헌정질서를 수호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정권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주는 대가로 대법원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밀거래, 법원 지도부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감시‧관리하는 법원관료주의의 병폐, 치밀하게 계산된 악의적인 소송 지연 등, 일부 정치화된 판사들에 의한 무책임하고 초법적인 사법권력 행사는 법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 행사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을 수단으로 한 인간의 자의적인 지배(rule by man)에 불과하다.

사법농단은 어떤 식으로든 발본색원되어야 할 적폐중의 적폐다. 왜냐하면 그것은 판사와 법원의 권위는 물론, 입헌민주주의 법질서의 정당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함으로써 우리사회를 폭력과 야만의 시대로 후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수차례의 자정 기회를 주었음에도 전혀 변한 것이 없다면 특별재판소와 같은 임시 기구를 통해 개혁을 강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독립과 자율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과 책임의식을 갖춘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김비환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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