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 FC는 후베닐A(19세 이하 팀)에 소속된 한국인 유망주 이강인(17)과 4년간 재계약했다. 당시 발렌시아가 계약서에 포함된 바이아웃(최소 이적료) 금액은 우리 돈 1,000억원이 넘는 8,000만 유로. 바이아웃 규모가 선수의 현재 가치를 나타낸다고 볼 순 없지만, 선수를 다른 팀에 빼앗기기 싫은지를 가늠할 수 있는 수치로는 충분하다. 발렌시아가 이강인을 헐값에 이적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셈이다. 재계약 시점과 맞물려 스페인 현지에선 스페인축구협회가 이강인에 귀화를 제안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강인은 귀화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구단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그의 잠재력과 가치를 충분히 확인했음을 증명한 사례였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이강인의 재능과 잠재력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강인은 31일 오전(한국시간) 스페인 사라고사의 에스타디오 데 라 로마레다에서 열린 코파 델 레이(국왕컵) 32강 1차전 에브로와 원정 경기에 선발 출전, 1군 무대에 데뷔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발렌시아가 창단한 1919년 이후 첫 동양인 1군 선수이자, 최연소(17세 253일) 외국인 1군 선수다.
한국에서라면 고교 2학년생일 나이에 등번호 34번을 달고 스페인 1부 선수들과 어깨를나란히 한 이강인은 전혀 주눅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팀의 2-1 승리에 일조했다. 후반 38분 알레한드로 산체스와 교체될 때까지 83분간 이질감 없는 플레이를 펼쳤다. 왼쪽 코너킥을 전담하는가 하면, 후반 11분엔 아크 정면에서 왼발 중거리슛을 침착히 감아 차 왼쪽 골 포스트를 때렸다.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음에도 흥분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그의 ‘진짜 가치’라고 여기는 의젓함과 담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공적인 ‘월반 데뷔전’을 마친 그에게 현지 언론 ‘마르카’는 ‘채석장의 진주’라는 표현을 곁들이며 극찬했다. ‘아스’는 이강인이 이미 1군에서 많은 훈련을 소화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발렌시아의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감독이 이강인을 신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축구팬들의 기대도 한껏 높아졌다. 이강인이 만 6세이던 2007년 TV 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해 축구영재로 주목 받은 뒤부터 그의 성장을 묵묵히 바라본 팬들은 온라인 축구커뮤니티 등에서 “내 동생의 성공을 지켜본 기분”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는 분위기다.
처음 입단한 인천유나이티드 유소년 축구팀에서부터 월반에 익숙했던 이강인은 2011년 스페인으로 건너가 발렌시아 입단 뒤에도 뛰어난 기량을 펼치며 계속 월반했다. 지난해 12월엔 발렌시아 2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른 그는 지난 7월엔 프리시즌 스위스 로잔 스포르와 연습경기를 통해 1군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비공식 기록이지만, 8월 독일 레버쿠젠과 프리시즌 경기에선 1군 첫 골을 기록했다.
그의 성장은 한국 축구대표팀에도 청신호다. 당장 내년 폴란드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본선과, U-23대표팀이 출전하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 나설 가능성도 높아졌다. 빠른 성장 속도로 소속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수년 내 파울루 벤투(49) 감독이 이끄는 A대표팀 승선도 노려볼 만 하다는 전망이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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