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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근 칼럼] 다시, 부모의 도리를 묻다

입력
2018.10.31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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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는 사회

빗나간 자녀 사랑과 도덕 불감증 유발

진정한 부모의 도리 깊이 성찰할 필요

한때 기여입학제에 눈길을 준 적이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농어촌특별전형 입학생들의 지도교수를 맡았을 때였다. 기여입학제의 문제점은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기부금과 대학 입학을 교환하는 게 정의롭지 않거니와 배금주의와 계층 간 위화감이 심화할 것도 명약관화했다.

그럼에도 기여입학제에 미련을 가졌던 건 학생들의 딱한 사정 때문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형편이 훨씬 열악한데도 사후 관리나 지원은 크게 미흡했다. 많은 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방학 때는 물론 학기 중에도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어떤 학생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을 여력이 없어 매일 길 위에서 4시간 이상을 보냈다. 학생들 태반이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돼 있기도 했다.

이런 현실을 목도하면서 다분히 공리주의적인 발상이 뇌리를 스쳤다. 정원 외로 부유층 학생 한 명을 받아 열 명의 저소득층 학생이 돈 걱정 없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한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 싶었다. 당시엔 저소득층 학생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겐 교육이 계층상승을 위한 유일한 사다리이기 때문이다.

폭발성이 강하고 민감한 사안인 까닭에 시간을 갖고 제도의 타당성을 면밀하게 따져 봤다. 우리 사회에선 착근하기 어려운 제도라는 결론을 얻었다. 유수 대학 졸업장이 신분상승의 보증수표라는 인식과 강고한 가족주의가 결합할 때 몰아칠 후폭풍이 가늠조차 어려웠다. 제도를 도입할 경우 적잖은 가정에서 심각한 세대 갈등이 발생할 게 분명했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가족주의는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한 개인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탓에 가족주의는 전혀 약화하지 않았다. 여기에 우리 사회에 미증유의 충격과 상흔을 남긴 IMF 외환위기는 가족주의가 자녀의 경쟁력 강화와 성공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방향으로 변질되도록 했다.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는 부모가 자식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는 전제 위에 구축돼 있다. 이런 배경에서 부모들은 갖은 희생과 헌신으로 자녀의 성공적 대학 진학을 돕는 걸 당연한 도리로 여긴다. 때로는 반칙과 탈법을 마다하지 않기도 한다. 이 같은 현실에선 기여입학제가 많은 가정에서 부모에게 감당할 수 없는 압박과 부담을 안길 게 자명하다.

특히 기부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가정의 자녀가 기여입학제를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변곡점을 가져올 지렛대라고 생각하게 되면 문제가 한층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부모가 자녀의 기대와 희망에 부응하지 못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자녀는 두고두고 부모의 무능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부모도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회한에 평생 시달릴지도 모른다.

최근 빗나간 자녀 사랑 때문에 부모 자신은 물론 자녀까지 나락에 떨어지는 일이 꼬리를 물고 있다.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이 피를 말리는 경쟁을 벌이는 강남 한복판에서 교사 아빠가 쌍둥이 딸들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지방의 한 대도시에선 아들을 의대에 보내려는 욕심에 학교 행정실장과 짜고 시험문제를 빼낸 의사 엄마가 영어의 신세가 됐다. 드러나지 않은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을지 두려움이 앞선다. 자녀 교육과 관련된 잘못엔 웬만하면 면죄부를 주곤 했던 게 도덕 불감증만 키운 듯싶다.

많은 부모가 자녀 주위를 맴돌며 끊임없이 뭔가를 채워주고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결핍을 경험하지 못한 영혼에게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기대하긴 어렵다. 실패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좀 더 단단해지는 기회를 갖지 못한 영혼은 단 한 번의 위기에서 처절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무엇이 진정한 부모의 도리인지 다시 한 번 깊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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