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볼티모어의 시민 노먼 모리슨(Norman Morrison)이 1965년 11월 2일 워싱턴D.C.의 미 국방부(펜타곤) 건물 인근에서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했다. 평화주의자였던 그와 아내 앤(Anne)은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적극 가담하며 세금 납부 거부운동도 벌이고, 신문에 기고하고,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열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1남 2녀의 아버지였던 31세의 그는 아내가 장남 벤(당시 6세)과 딸 크리스티나(5세)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러 간 사이 막내 에밀리(1세)를 데리고, 40마일을 달려 당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집무실에서 10m 남짓 거리에서 분신을 감행했다. 직전 그는 에밀리를 낯선 행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일주일 뒤 로저 앨런 라포르테(Roger Allen LaPorte)라는 청년도 뉴욕 유엔빌딩 앞에서 분신했다. 그들의 분신 이후 반전운동이 격화했다.
이후 전쟁과 반전운동의 충격적인 뉴스들에 밀려 모리슨은 점차 잊혀갔다. 오히려 그는 북베트남과 종전 후 베트남의 영웅으로 기억됐다. 모리슨이 숨진 지 닷새 뒤 베트남의 혁명 시인 ‘토후(To Huu, 1920~2002)’는 모리슨이 딸 에밀리에게 마음을 전하는 형식의 시 ‘Emily, My Child’를 발표했고, 그 시는 베트남 청소년들의 애송시가 됐다. 호찌민 정부는 다낭의 한 거리에 그의 이름(Mo Ri Xon)을 붙였고, 그의 얼굴을 새긴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앤은 대외적으로는 남편의 뜻을 결연히 대변했지만, 명분만으로는 온전히 납득할 수 없는 상실감으로 고통받았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앤은 2년 뒤 재혼했다가 파경을 맞았고 74년 세 번째 결혼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이듬해 벤을 암으로 잃었다. 가족은 99년 베트남 정부 초청으로 현지를 방문, 비로소 억눌러 왔던 슬픔과 분노 등등의 감정을 터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맥나마라의 ‘상처’도 있었다. 그는 90년대 자서전에서 전쟁에 대한 회한과 함께 저 일을 언급하며 “모리슨을 생각하면 감정이 복받쳐 한동안 누구와도, 심지어 가족들과도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고 “내 가족 역시 모리슨이 전쟁에 대해 품은 생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책 출간 직후 앤은 맥나마라에게 편지를 썼고, 맥나마라는 앤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했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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