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문교부는 우수국산영화 시상제를 연다. 2회 만에 그친 이 행사는 대종상 영화제(대종상)의 뿌리로 여겨진다. 1962년 본격적으로 출범한 대종상은 초기엔 문화공보부(문공부) 또는 문공부 산하기관이었던 영화진흥공사가 주관했다. 권위주의 시절 관제 어용 영화상의 성격이 짙었다. 1960~70년대 언론사들이 여러 영화상을 만들어 경쟁했지만 영화인들은 대종상을 유난히 받고 싶어 했다. 대종상 작품상과 최우수반공영화상을 받으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 따랐기 때문이다. 외화, 특히 할리우드 영화 수입은 당시 돈방석을 의미했다. 1984년 외화 수입 자유화 조치가 이뤄지기 전까지 외화 수입은 법에 따라 엄격히 규제됐다.
▦ 이권이 걸렸으니 대종상은 치열한 로비의 장이었다. 수상 결과를 두고 잡음이 심했다. 반정부 영화는 제작도 힘들었지만 친정부 영화인들이 주도하던 대종상 후보에 오르기도 쉽지 않았다. 빨치산을 다뤄 높은 평가를 받은 ‘남부군’(1990)’은 대종상을 아예 받지 못했고,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이혜숙)을 받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는 미군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인지 대종상에서 의상상만 받았다.
▦ 대종상은 민주화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가장 오래 시행된 영화상이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다. 1996년엔 스스로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미완성 영화 ‘애니깽’에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주며 충무로 안팎에 파란을 불렀다. 제멋대로 후보자(작) 선정과 수상자(수상작) 결정이 이어지며 빈축을 샀다.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에 15개 상을 몰아줘 논란이 일었다. 대충대충 시상한다 하여 ‘대충상’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2015년 시상식에 오지 않는 배우에게는 상을 줄 수 없다는 주최 측의 입장이 나와 ‘출석상’이라 불렸다.
▦ 지난 22일 열린 제55회 대종상 시상식이 또다시 조롱의 대상이 됐다. 음악상 대리 수상이 가장 큰 실소를 불렀다. 수상자인 영화 ‘남한산성’의 사카모토 류이치나 영화사와의 인연은커녕 “사카모토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는 무명 가수가 수상을 대신했다. 상을 존경과 격려의 의미가 아닌 시혜 정도로 여기는 주최 측의 인식이 반영됐다. 미국 아카데미영화상과 그래미어워즈 등 숱한 상을 받은 뉴에이지 음악의 대가 사카모토는 이번 대종상 수상을 특별하게 기억할지 모른다. 어느 네티즌은 관련 기사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부끄러움은 왜 우리(대중)의 몫이어야 하는가.”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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