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법원 실패의 강한 후폭풍 맞은 법원
물갈이식 사법부 청산 작업은 지양하고
법원구조 환골탈태로 추락한 신뢰 찾아야
검사가 각종 수사기록을 미리 제출하면 법관이 사무실에서 검토한 뒤에 재판정에 나와 몇 가지 궁금한 사항만 질문하고 곧장 선고 절차로 들어가는 게 과거 형사 법정의 풍경이었다. 검사와 변호사, 판사 3자 사이에 오가는 서류를 통해 변론과 심리가 진행되는 사실상 ‘서류 재판’이라 피고인의 항변은 설 자리가 없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도입한 게 공판중심주의다. 모든 증거자료를 공판정에 집중시켜 공판을 통해 얻은 심증만으로 재판을 하자는 원칙으로 국민참여재판이라는 형태로 가시화하면서 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법정 공방이 가능해졌다. 사법부의 이런 획기적 변화는 이용훈 사법부의 최대 치적으로 법원사에 기록돼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에게 바통을 넘겨받은 양승태 대법원장도 직전 사법부에 버금가는 치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취임 이후 3년 동안 법원행정처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던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슈는 상고법원. 대법원에 접수되는 상고심이 연간 4만건에 이르다 보니 제대로 된 심리가 불가능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2심과 3심 사이에 상고법원을 만들어 상고심을 맡기고 대법원은 정책법원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상고법원은 김명수 대법원장조차 인사청문회에서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한 제도로, 만약 정상적으로 추진됐다면 양승태 사법부의 기념비적 치적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 안팎의 공감대 없이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도리어 ‘사법농단’의 주범으로 몰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지금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재판거래’ 의혹 또한 상고법원을 추진하다 생긴 참사였다.
양승태 사법부의 정책 실패가 부른 후폭풍은 상상 이상이다. 양 전 대법원장 본인뿐 아니라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3명의 전ㆍ현직 대법관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핵심 수사선상에 올라 있으며, 30여명의 검사가 투입된 수사과정에서 80여명의 판사가 조사를 받았다. 법원행정처에 근무했던 엘리트 판사들이 집중 타깃이 되면서 법원은 사실상 쑥대밭 지경이 됐다. 서울고등법원에 근무하고 있는 한 부장판사는 “만나면 홧술만 들이키기 때문에 판사들끼리 만나는 자리를 피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청와대와 재판을 거래했다는 의혹이나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자체가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다. 가히 사법농단이라 부를 만한 모든 사안의 진실이 검찰수사와 향후 재판과정에서 낱낱이 규명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법부 물갈이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청산작업은 지양해야 한다. 재판 절차에 개입했다는 고등부장 판사의 징계를 대법원장이 직접 요청하고 경징계에 해당하는 견책처분 사실을 공개하는 무리수가 계속된다면 누가 사법부 개혁의 진정성을 믿겠는가. 정권교체와 함께 대법관을 순차적으로 바꾸면서 사법부를 장악했던 관례와 달리 직전 사법부의 핵심들을 찍어 내는 방식이라면 ‘물갈이 개혁’이라는 의심만 사게 될 것이다.
사법농단 소용돌이에 사법부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중에 김명수 사법부의 무원칙 행보가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규명해 달라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해 놓고 검찰의 자료 요구를 거부하는 대법원의 행보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법원 주변에서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의 정무감각 부족을 지적하는 수군거림이 들리고 “자료가 공개되면 치부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대법원이 욕을 먹더라도 감추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는 비아냥이 나돌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 9월 취임 1주년에 맞춰 법원행정처 폐지, 법원 이원화 완성,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등의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런 외과수술만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탈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과거에 발목 잡혀 허송세월하다가는 이용훈 사법부처럼 진취적이고 과감한 개혁은 꿈도 꾸지 못한다. 수렁에 빠진 사법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법원 구조를 송두리째 바꾸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김정곤 논설위원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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