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조지아 마지막 직선제 대선
구 소련 및 독립국가연합에 속한 적이 있는 러시아 주변국 가운데 현재 러시아와 최악의 관계가 된 국가는 우크라이나지만, 흑해 동쪽의 캅카스산맥 남쪽에 위치한 조지아도 반(反)러시아 성향은 만만치 않다. 소련 치하에서 가혹한 탄압을 당한 조지아는 1991년 소련 붕괴로 독립한 후 러시아와 빈번히 충돌했다. 조지아 내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국제사회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자치를 유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조지아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가입에 열을 올리게 됐다.
하지만 최근 조지아의 정책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서구의 힘은 예전 같지 않고,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넘어 중동까지 영향력을 뻗치고 있다. 조지아는 나토와 EU 가입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견제와 기존 서구 회원국의 미온적인 태도로 진전이 없다. 조지아 집권 여당인 ‘조지아의 꿈-민주 조지아(GDDG)’는 최근 지역 안정을 위해 남오세티야ㆍ압하지야를 향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상대 측은 아직 호응하지 않고 있다.
◇여당 후보 주라비슈빌리 ‘러시아 옹호’ 논란
이런 가운데 28일 치러지는 조지아 대선이 대(對)러시아 정책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지폈다. 무소속 후보이긴 하지만, GDDG의 지지를 받아 사실상 여당 후보로 간주되는 살로메 주라비슈빌리 후보의 발언 때문이다. 선거운동 첫날 그는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책임은 러시아와 조지아 양쪽에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러시아는 1세기 전부터 전쟁을 벌여 왔다. 우리는 러시아의 도발에 응해 적대 행위를 개시했다. 조지아도 이 적대 행위를 개시한 것이 사실이다. 전쟁의 비극은 우리의 비극이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절대 도발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나라라면 적보다 똑똑해야 한다.”
주라비슈빌리의 발언은 제1야당 통합국민운동당(UNM)의 실질적 수장인 미하일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 사카슈빌리는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당시 ‘침공’ 결정을 내렸다가 러시아군의 공세에 밀려 참패했고, 반정부 시위에 시달린 끝에 2013년 퇴임했다. 이후 권력 남용 등 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미 해외로 도피한 뒤였다.
과거 사카슈빌리 정권에 맞선 인사들은 주라비슈빌리의 발언 자체는 이치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사카슈빌리 집권 당시 야권 수장이었던 기오르기 카인드라바는 “사카슈빌리 정부가 정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했다”며 “이는 EU 보고서를 통해서도 확인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권 후보들은 주라비슈빌리의 발언이 러시아에 정치적 빌미를 제공했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현재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남오세티야 전쟁 범죄를 다루는 재판 절차가 진행 중인데, 그 재판에서 조지아의 입지를 줄였다는 것이다. UNM의 외교관 출신 의원 살로메 사마다슈빌리는 “주라비슈빌리가 집권하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는 독립 국가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며 “그는 조지아의 국토 통합을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라비슈빌리의 ‘친러시아’ 발언은 그간 집권 GDDG의 정책과도 연결된다. 조지아 정부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러시아가 남오세티야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나, 러시아와의 교역이 조지아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GDDG 정권은 러시아에 좀 더 온건한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야권은 서방을 상대로 광범위한 선거 개입을 시도한 바 있는 러시아 정부가 이번 조지아 대선에도 주라비슈빌리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돌아오려는 사카슈빌리, 막는 이바니슈빌리
조지아는 지난해 내각제로의 개헌을 완료했다. 이번 대선으로 뽑히는 새 대통령 취임과 함께 발효되는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는 폐지되고, 의회와 지역대표로 구성된 300인 선거위원회가 대통령을 뽑게 된다. 따라서 차기 대통령은 당분간 조지아에서 직접 선거로 뽑히는 마지막 대통령이 된다. 권한도 대폭 줄어든다.
하지만 신임 조지아 대통령에게도 군통수권과 입법거부권, 사면권과 시민권 부여 권한 등이 남아 있다. 현재 조지아 상황에서 사면권과 시민권 부여 권한은 그 의미가 대단히 크다. 현재 해외를 전전하고 있는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을 사면하고 그의 조지아 시민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야당 통합국민운동당(UNM)의 실질적 구심점인 사카슈빌리가 돌아온다면 조지아의 정치 지형도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이번 대선에 자신의 운명이 달린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은 사활을 걸었다. 그리골 바샤제 전 외무장관을 UNM의 후보로 내세우고 10개 정당을 망라한 야권 연대를 구성했다. 반대로 집권당 조지아의 꿈(GDDG)은 사카슈빌리를 막기 위해 당력을 모으고 있다. 공식적으로 GDDG는 이번 대선에 후보를 내지 않았지만, ‘억만장자 정치인’으로 불리는 GDDG의 실세 비지나 이바니슈빌리(62) 전 총리는 반사카슈빌리의 상징인 주라비슈빌리를 밀기로 결정했다.
GDDG 정권은 올해 들어 각종 악재로 수세에 몰려 있다. 저개발된 경제는 개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7년 말 발생한 16세 청소년 2명의 피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축소했다는 의혹이 올해 6월 들어 초대형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결국 기오르기 크비리카슈빌리 총리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달 들어서는 반정부 성향 민영방송 ‘루스타비2’가 GDDG 지도부의 뇌물 강요와 돈세탁 혐의를 폭로하는 녹음 테이프를 공개했다.
하지만 “이바니슈빌리가 찍으면 당선”이라는 말까지 있는 조지아 사회의 특성상 주라비슈빌리가 불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조지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이바니슈빌리와 GDDG가 쥐고 있는 이권 네트워크의 힘은 야권을 크게 압도한다. 더구나 조지아 국민 사이에서는 ‘도망자’ 사카슈빌리에 대한 반감도 아직 크다. 바샤제 전 외무장관은 대중적 인기도 없고 사카슈빌리의 대리인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제2야당인 ‘유럽 조지아당’이 후보로 내세운 다비트 바크라제 전 의회의장의 존재도 변수다. 바샤제와 바크라제 두 후보는 1차 대선 단일화에는 실패했지만 결선이 치러질 경우 상호 지지하기로 신사 협정을 맺은 상태다. 그러나 이 협정 또한 주라비슈빌리가 50% 이상을 득표해 1차 대선에서 당선될 경우 물거품이 될 수 있다. 2013년 대선에서 기오르기 마르그벨라슈빌리 현 대통령은 61%를 득표해 결선 없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