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에서 유학(儒學)사상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유학을 창시한 학자는 공자였다. 인(仁)이라는 중심사상을 전제로 하여 ‘논어(論語)’라는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이 유학의 제일로 여기는 고전이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라는 학자의 문하에서 배출된 맹자가 나와 ‘맹자(孟子)’라는 고전을 통해 의(義)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인과 함께 의가 합해져 인의(仁義)의 유학사상이 유교의 중심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양의 유학사상은 바로 그러한 인의를 얼마나 실천하느냐로 그 시대를 평가하고, 그 인간을 평가하게 되었다. 인의가 제대로 실천되는 시대는 좋은 세상이요, 좋은 나라였으나 인의가 무너지고 인의가 사라진 세상은 나쁜 세상이요, 나쁜 나라였다. 그래도 인은 역시 의보다는 한 단계 높은 경지였다. 인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한 공자는 성인(聖人)으로 존숭되었고, 의를 실천한 맹자는 아성(亞聖)이라 하여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니 역시 의는 인의 아래 단계라고 여길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조선 500년은 어떤 시대보다도 유학사상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배우고 실천했던 시대였다.

완전무결한 인의 실천이야 성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그래도 의는 인간이 노력하면 실천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의를 위해 생명까지 바친 의인들이 나타났으니, 고려 말 대표적인 충신이자 의인이던 포은 정몽주야말로 의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포은을 이어서 조선 초기에 등장한 사육신들 또한 조선을 대표했던 의인이자 의의 실천자로 여기는 것에 이견이 없다. 천재적인 두뇌와 뛰어난 학식, 탁월한 충성심으로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의 치세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박팽년(1417∼1456)과 성삼문(1418∼1456)은 사육신 중에서도 쌍벽으로 39세와 38세라는 한창의 나이에 의를 지키다가 능지처참의 악독한 형벌로 세상을 떠난 의인들이었다. 팔과 다리 등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그런 죽음이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일이던가.

인간이 의를 실천하고 의리를 지키는 일은 그렇게 무서운 일이다.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의는 생각도 말아야 한다. 참으로 젊은 시절부터 성삼문은 아버지가 중국의 사신으로 가는 때가 많아 그를 따라 중국을 여행한 때가 많았다. 동양 5,000년 역사에서 의를 말하면 맨 먼저 거명되는 사람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였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혁명을 위해, 악독한 임금 주(紂)를 정벌하려고 말을 타고 나가자 주(紂)의 신하였던 백이ㆍ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당기며 신하가 임금을 정벌함은 인(仁)도 의(義)도 아니라고 간(諫)했다고 한다. 결국 무왕이 성공하여 주(周)가 천하를 통일하자 백이ㆍ숙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를 내세우고 수양산에 들어가 숨어살면서 고사리만 캐먹고 살다가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만고의 충신이 된 백이ㆍ숙제를 위해 수양산 아래에는 이제를 찬양하는 비가 서 있는데 이른바 ‘이제비(夷齊碑)였다.

중국에 간 성삼문은 우연히 이제비가 서있는 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지었다.

그때 말고삐 당기며 그르다고 감히 말했으니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빛나더라 (大義堂堂日月輝)

풀과 나무 또한 주나라 이슬과 비로 자라는데 (草木亦霑周雨露)

그대여 수양산 고사리 자신 것 부끄러하소 (愧君猶食首陽薇)

(‘六先生遺稿’)

무왕이 천하를 통일했으니 수양산 또한 무왕이 통치하는 주나라 땅이고, 거기서 자라는 고사리 또한 주나라 생산품인데 그걸 먹고 살았으면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라는 성삼문의 호통이었다. 전하는 말로는 그 시를 이제비에 딱 부쳤더니 비가 부끄러워 땀을 쭉쭉 흐르더라는 전설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시는 시조로도 전해진다.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 애달파한다

굶어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먹어야 되는가

비록 푸성귀라도 그게 누구 땅에서 났던고?

천하의 충신이자 의인이던 백이숙제가 부끄러워 땀을 쭉쭉 흐르게 했던 성삼문,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만한 의리를 지닌 성품의 사나이였을까!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恨)하노라”의 한이란 바로 한스럽게, 애달프게 여긴다는 뜻이었으니, 성삼문의 그 뛰어난 기개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이 시조를 읽을 때나, “그대여 수양산 고사리 먹었던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시오”라는 대목을 읽을 때는 가슴이 울렁이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금전에, 재물에, 쥐꼬리만한 권력에 눈이 멀고 마음이 막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고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면서 의리에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옳게만 살아갔던 의인들을 생각하며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앞의 정권이 그렇게 권력을 농단하고 비리와 부정으로 가득 찼건만 돈과 권력의 유지를 위해 내시와 환관으로 지내던 고관대작들이 야당이 되었다고 정부ㆍ여당에 온갖 막말을 퍼붓는 것을 보면서, 의라는 유학사상은 이제 뿌리까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성삼문의 의리와 기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주려 죽은들 고사리를 먹어서야 되겠는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ㆍ우석대 석좌교수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