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13년 전인 2005년 강원 강릉시에서 일어난 노파 살인사건의 증거로 제시한 테이프 속 쪽지문. 연합뉴스
13년 전 홀로 사는 노인을 살해한 용의지로 지목된 50대 남성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항소심 법원은 1심과 마찬가지로 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테이프에 1㎝ 가량 남아 있는 쪽지문(일부만 남은 지문)을 범행을 입증할 증거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한때 과학수사의 성과로 여겨졌던 이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져들게 됐다.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형사 1부는 24일 살인강도 혐의로 법정에 선 정모(51)씨게 무죄를 선고 했다.
재판부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피고인의 쪽지문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하기 어려워 원심의 판단은 적법하고 검사의 항소는 이유 없어 기각한다”고 밝혔다. “테이프에 남은 지문이 정씨의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노파 살해와 무관하게 남겨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 지난해 12월 1심 판결과 같은 취지다. 당시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9명 가운데 8명도 정씨가 무죄라고 판단했다.
항소심 선고 직후 법정을 나선 정씨는 “죄가 없으니까 무죄 판결이 난 거 아니겠나. 나는 모르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2005년 5월 13일 낮 12시쯤 강원 강릉시 구정면 덕현리에 홀로 사는 A할머니(당시 69세)를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 등을 감아 살해하고, 78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지난해 9월 기소됐다.
사건 발생 12년 만에 경찰이 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며 제시한 증거는 현장에서 수거된 노란색 테이프에 남았던 1㎝ 가량의 쪽지문. 경찰은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을 통해 지문 융선이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정씨를 법정에 세웠다.
항소심의 쟁점도 테이프 속 쪽지문이 노파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과정에서 묻었는지 여부였으나 재판부는 “합리적 의심만으로 범행이 증명되기 어렵다”고 봤다.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가 없다면 설령 유죄의 의심이 가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다.
검찰과 경찰이 제시한 증거가 법정에서 두 차례나 인정받지 못하면서 강릉 노파 살해사건은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 전대양 가톨릭관동대 교수는 “13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 결정적 단서인 ‘스모킹 건’을 추가로 찾아내기 어렵고, 피고인이 알리바이를 입증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이날 피해자 가족들은 “과학수사를 통해 용의자의 지문이 나왔는데 무죄라니 믿을 수 없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검찰은 “항소심 판결문을 검토한 뒤 조만간 상고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춘천=박은성 기자 esp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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