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귀환
앞글에 이어 사도세자 이야기를 좀더 해야겠다. 사도세자는 1760년 7월 18일에 출발해, 8월 4일에 환궁했다. 당시 사도세자는 화증이 극에 달해,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을 크게 다치게 하는 일까지 있었다. 혜경궁은 통제가 안 되는 세자의 광태(狂態)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한중록’에서 그녀는 “하늘같은 남편이 아무리 중하다 해도 나 역시 목숨을 언제 마칠지 몰라 너무도 망극하고 두려워, 한마음으로 오로지 경모궁 뵙지 않기만을 원하였으니, 경모궁께서 온양 거둥하신 사이라도 뵙지 않음을 다행히 여기더라”라고 썼을 정도였다.
막상 길을 나선 사도세자는 행렬이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엄히 단속했고, 백성에게도 위엄과 은혜를 드러내 행차 내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이 항간에 퍼진 세자가 미쳤다는 소문도 모함이 분명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 기억은 2년 뒤인 1762년 윤 5월에 세자가 뒤주에 갇혀 참혹하게 죽으면서 잊혔다. 그것을 다산이 30년 만에 꺼내 되살려 낸 것이다.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 10월 7일에 수원 화산의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긴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타이밍이 절묘했다.
◇‘중국소설회모본’에 남은 사도세자의 마지막 친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지나역사회모본(支那歷史繪模本)’이란 책이 있다. 이 제목은 뒤에 표지를 바꾸면서 일본인이 붙인 것이다. 책 앞쪽에는 궁궐의 장춘각(藏春閣)과 여휘각(麗暉閣)에서 1762년 윤 5월 초 9일에 완산(完山) 이씨(李氏)가 쓴 ‘서(序)’와 ‘소서(小敍)’가 실려 있다. 책은 화원 김덕성(金德成) 등 몇 사람을 불러 중국 소설 속에 나오는 삽화 중에 교훈이 될 만한 것을 베껴 그리게 해서 책으로 묶은 것이었다. 실제로는 ‘중국소설회모본’이 바른 제목이다.
그간 이 글을 쓴 완산 이씨의 정체를 두고 여러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대 정병설 교수의 논증으로 이 글씨가 사도세자의 친필이고, 그 시점도 뒤주에 갇히기 불과 나흘 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로 이 글은 사도세자의 문집인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권 6에 ‘화첩제어(畫帖題語)’와 ‘후제(後題)’란 제목으로 그대로 실려 있다. 다만 문집에 실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될 만한 내용에 대한 검열 삭제가 있었고, 원문도 핵심만 간추려 실었다.
병증으로 속이 답답했던 세자는 소설에 탐닉하여 답답함을 견디려 했던 듯하다. ‘서’에서 세자는 “무릇 한 권 안에 역대의 일을 모두 갖추었으니 봄날과 겨울 밤에 병을 구하고 적막함을 구하거나 소일하는데 일조하기에 충분하다.(凡一卷之內, 歷代悉備, 可足春日冬夜, 求病求寂, 一助消日也夫.)”고 썼다. ‘소서’에서는 “책 머리에 서문을 쓰고 또 끝에 소발(小跋)을 지어 후대의 자손에게 전하니 아무렇게나 보지 말라.(引書序于首, 又作小跋于末, 以傳後之子孫, 其勿泛看也夫.)”라고도 했다.
◇사도세자, ‘성경직해’와 ‘칠극’을 읽다
사도세자는 특별히 ‘소서’에 자신이 즐겨 읽어 답답한 마음을 풀었던 소설책 등 모두 93종의 서명을 나열했다. 이 책이 진작부터 주목 받았던 것은 여기 적힌 소설책 목록 때문이었다. 당시 인기 높던 소설책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사도세자는 자신이 본 소설책의 목록을 ‘대조목(大條目)’과 ‘소조목(小條目)’, ‘대중소질(大中小秩)’과 ‘음담괴설(淫談怪說)’ 등 모두 네 가지 범주로 나눠서 적었다. 이 중 ‘소조목’에 속한 책 이름 가운데 놀랍게도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칠극(七克)’이 들어있다. 세자는 이 두 책을 패관소사(稗官小史)의 하나로 본 듯이 썼지만, 조선에서 훗날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 이 두 책이 당시에 이미 세자의 거처에 놓여 읽힌 것은 놀랍다.
‘성경직해’는 1636년 북경에서 초간된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디아즈(E. Diazㆍ 1574∼1659)가 쓴 복음해설서다. 주일 미사에 읽을 신약 4복음서의 내용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주해를 단 책이다. 성경이 번역되기 전 초창기 신자들은 이 책을 통해 성경을 접했다. 미사와 각종 축일에 읽을 성경 부분이 번역된 책을 읽으면서, 사도세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이때는 최초의 천주교 모임인 1785년의 명례방 추조적발사건이 있기 23년 전이니, 사도세자가 읽었던 ‘성경직해’는 당연히 한문본일 수밖에 없다.
◇대궐로 유입된 천주교
이재기의 ‘눌암기략(訥菴記略)’에 나오는 다음 한 단락이 특별히 흥미롭다.
“이윤하(李潤夏)가 일찍이 서학서가 대궐 안에 또한 이미 유입되었다고 얘기했다. 내가 따끔하게 그를 나무라며 말했다. ‘대궐 안의 일을 그대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 뒤로는 이윤하가 나를 대하면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저들의 무리가 늘상 하는 얘기였다. 신유년(1801)에 정약종이 돌아가신 임금을 무함 잡은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사학에 물든 죄는 버려두고라도 이 한 가지만으로도 죽음을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할 만하다.”
이윤하는 성호 이익의 외손자로 1785년 명례방 추조적발 당시에 참석했던 인물이다. 그는 녹암 권철신의 누이 동생과 결혼했다. 이윤하는 서학을 배척하는 입장에 선 이재기에게 천주교를 자신들만 믿는 것이 아니라, 대궐에서도 믿으니 크게 문제 될 것 없다는 취지로 허물없이 말을 했던 모양이다. 이재기는 그를 꾸짖은 일을 적고, 천주교를 믿는 자들에게서 이 같은 말을 늘상 들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1801년 2월 12일 정약종이 추국을 당할 때 돌아가신 정조 임금을 무함 잡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대궐 안에 이미 천주교가 깊이 침투해 있었고, 정조 또한 이를 알고 있으면서 방조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최익한은 1938년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 뜻밖에도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가 서교의 신자였다는 항간의 전언을 언급했다. 몇 해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정조의 친동생인 은언군(恩彦君) 인(裀)의 아내 송씨와 그 아들 담(湛)의 처 신(申)씨도 1801년 천주교를 믿어 외인과 몰래 왕래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궐내에 암암리에 침투한 천주교에 대한 풍문은 당시에 이미 공공연한 비밀처럼 발설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살펴볼 기회를 갖겠다.
어쨌거나, 천주교 신앙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근 30년 전에 이미 사도세자가 대궐 안에서 ‘성경직해’와 ‘칠극’을 읽고 있었다. 다산이 궐내에서 정조와 함께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오는 책을 본 것 등과 맞물려 볼 때, 서학서는 진작부터 대궐 심층부에 들어와 있었고, 정조 또한 이를 공론화해 문제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벼슬길의 순탄한 행보
사도세자의 묻힌 자취를 들고 1790년 3월 25일경 상경한 다산은 초계문신의 시험에 참여하는 한편, 5월 3일에 김이교(金履喬)와 함께 예문관 검열에 다시 추천되었다. 다산은 세 번째로 사직 상소를 올렸고, 한 번 더 명분을 쌓은 정조는 이틀 뒤인 5월 5일에 품계를 세 단계 뛰어넘어 다산을 종 6품의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로 임명해 버렸다.
6품(品) 이상 정3품 당하관(堂下官)까지의 관직을 참직, 또는 참상직(參上職)이라고 하고, 7품 이하는 참하직이라고 했다. 직급에 따른 대우 차이가 컸다. 그래서 참하직에서 참상직으로 오르는 것을 승륙(陞六) 또는 출륙(出六)이라고 했는데, 정조는 다산에게 종 9품의 예문관 검열 대신 세 단계 건너 뛴 종 6품의 용양위 부사과로 출륙하는 파격적 승진을 단행했다.
이후 다산의 정치적 행보는 그런대로 순탄하게 이어졌다. 7월에 사간원 정언에 오르고, 7월 하순에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울산을 다녀왔다. 이후 다산은 왕명에 따라 각종 시험의 시관(試官)이 되어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해 9월의 증광 별시에 둘째 형 정약전이 합격하는 경사가 있었다. 11월에 아버지 정재원은 울산부사에서 진주목사로 승차했다.
◇1791년, 갈등과 격랑
해가 바뀌자, 정조는 정월 대보름 이튿날 수원부로 행차하여 현륭원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리는 것으로 새해의 일정을 시작했다. 남인이 주도하는 개혁의 드라이브에 서서히 시동이 걸렸다. 2월 12일, 체제공은 시전(市廛)의 폐단을 거론하며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건의했다. 시전이 독점하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특혜를 철회하여 소상인을 보호하는 것을 기조로 한 개혁이었다. 여기에는 노론이 독점해온 정치자금의 돈줄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활발히 유입되면서 여러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도고(都賈)라 불리던 큰 장사꾼들에 의해 독점되던 시장 구조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였다. 특혜의 철회로 일방적인 시장 보호 정책에 변화가 오고, 소상인들의 상업 활동에 활로가 열렸다. 6월이 되자 채제공은 전매권을 지켜주며 물가 통제와 조절 기능을 맡고 있던 평시서(平市署)의 혁파까지 주장하는 등 공세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금난전권의 폐지 이후 노론으로 흘러 들던 돈줄이 꽉 막히자, 노론으로서는 채제공 주도의 개혁 공세에 정치적 반격을 기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는 계속해서 채제공과 남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노론은 이 와중에 채제공의 대채(大蔡)와 채홍리의 소채(小蔡), 또는 채당(蔡黨)과 홍당(洪黨)으로 일컬어지는 남인 내부의 틈새를 파고들며 균열을 일으켰다. 미묘한 갈등이 파문을 일으키던 중에 제3차 교난이라 할 천주교 진산 사건이 터졌다. 주인공은 다산의 이종사촌이자, 다산 형제가 입교 시켰던 윤지충이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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