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 단체교섭권 인정’ 판결 뒤엔 방송사 갑질
방송3사 9년간 32억 미지급… “표준계약서 시급”
“카드대출을 받아서 출연부터 했는데…”
20년 넘게 연기생활을 한 무명배우 A씨는 요즘 카드 빚 독촉 문자메시지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A씨는 작은 역할이지만 50여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나름대로 프로라고 자부해 왔다. 출연한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할 때는 작은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제대로 된 출연료를 받은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다. 수시로 카드대출을 받았더니, 신용불량자가 됐다. 얼마 전 한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냐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출연료를 미리 줄 수 없다는 말에 거절했다. A씨는 “배우로서의 삶이 괴롭다”며 “은퇴 선언을 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상위 1%에 가려진 ‘을’의 눈물
A씨 같은 사례는 방송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조연급이 아니면 배우 대부분이 드라마 등을 촬영할 때 ‘을 중의 을’ 처우를 받는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한연노)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금까지 지상파 방송 3사(KBSㆍMBCㆍSBS)에서 배우들이 받지 못한 출연료는 32억원이다. 구두계약이나 촬영 이후에 계약하자는 방송사들의 불공정거래가 횡행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2016년 KBS 사극 ‘정약용’에 출연하기로 한 무명 배우들은 약자의 설움을 체감했다. 출연을 확정 지은 얼마 뒤 드라마의 편성이 불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드라마가 엎어졌다(중단됐다는 업계 속어)’라는 소식은 문자메시지로만 전달됐고, 담당 PD는 연락 두절이었다. 사극 촬영은 보통 6개월 정도 걸리니 출연자 대부분은 다른 드라마나 영화 촬영 출연 제안을 다 거절했다. 당시 참여 배우는 “‘정약용’의 제작이 중단되면서 순식간에 백수가 됐다. 방송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대법원은 “방송연기자들로 하여금 노동조합을 통해 방송사업자와 대등한 지위에서 교섭할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결했다(본보 10월13일자 보도). 한연노가 2012년 KBS와 출연료 협상을 하던 중 중앙노동위원회가 “연기자는 노동자가 아니”라며 별도의 단체교섭 자격을 인정하지 않아 소송을 내면서 시작된 법정 싸움의 최종 결과였다. 한연노는 배우와 성우, 코미디언, 무술연기자 등 방송연기자 5,000여명이 가입한 단체. 대법원 판결로 한연노는 지상파 방송 3사와 7년 만에 단체교섭에 나설 수 있게 됐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
◇‘그림의 떡’ 출연료, 캐스팅 디렉터의 횡포
지난해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세청에서 받은 ‘연예인 수입 신고 자료’(2016년 기준)를 보면, 배우 평균 수입은 4,200만원이다. 하지만 부익부빈익빈이 극심하다. 수입을 신고한 배우 1만5,870명 중 상위 1%(158명)의 연평균 수입(세전 기준)은 20억원이 넘었다. 상위 1%가 전체 수입의 47.3%를 벌어들였다. 하위 90%(1만4,283명)의 연평균 수입은 620만원으로, 매달 52만원을 버는 수준이었다. 한연노는 “노조 조합원 73%가 연소득 1,000만원도 안 되는 저소득자”라고 밝혔다.
배우들의 수입이 적은 이유 중 하나로 방송사들의 꼼수 계약에 따른 출연료 후려치기가 꼽힌다. 지상파 방송 3사는 드라마를 제작할 때 배우들에게 ‘출연료 기준표’를 제시해왔다. 케이블 채널이나 종합편성채널(종편)도 2011년 작성된 ‘KBS 출연료 기준표’를 가이드라인으로 삼는다. 방송 출연 횟수에 따라 6~18등급까지 구분해 놓고 ‘10분 기본료’를 바탕으로 일일연속극, 주간ㆍ주말연속극, 단막극, 미니시리즈ㆍ특집극으로 세분화해 출연료를 산정했다. 가령 6등급에 속하는 배우가 60분짜리 미니시리즈에 한 회 출연하면 37만원(가산율 적용)가량을 받는다. 그런데 방송사는 70~90분으로 드라마를 방영하는 꼼수를 쓰는 경우가 많다. 정상적인 계약이라면 47만~56만원의 출연료를 줘야 한다.
최근에는 방송사 PD와 배우를 연결해주는 캐스팅 디렉터의 횡포도 늘었다.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캐스팅 디렉터는 배우에게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캐스팅이 되면 출연료의 20~30%를 수수료로 떼간다. 단역배우 등에게는 이 수수료가 ‘벼룩의 간’에 해당한다. 단막극 출연료로 30만원 받고 캐스팅 디렉터에게 9만원(수수료 30%의 경우)을 주면, 배우는 21만원만 챙기게 된다. 지방에서 철야 촬영해야 하는 경우 별도 수당이 나와도 남는 게 없다.
캐스팅 디렉터가 방송사의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있다. PD들은 캐스팅 디렉터를 통해 출연료를 간접적으로 조율하고, 캐스팅 취소도 통보할 수 있다. 김준모 한연노 위원장은 “방송사가 (촬영 전) 합리적인 계약을 맺고, 계약 위반에 대해서 위약금을 물어줄 수 있는 환경이 하루빨리 조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ㆍ방송사의 인식 개선 시급
배우들은 지상파 방송 3사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꿈틀’해주는 것만으로 방송계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상파 방송의 한 관계자는 “드라마제작사협회는 한연노와 협약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방송사가 기본 협약을 맺어놓으면 그것이 외주제작사들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수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문화된 표준출연계약서를 되살릴 필요도 있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표준출연계약서가 있지만 권고 사항이라 강제성이 없다. 불공정거래를 개선하기 위해 서울시에 불공정 신고 센터가 있고, 한국콘텐츠진흥원에 공정상생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예술인 신문고가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한연노나 희망연대 방송스태프노조는 노사정 협의체를 구성해 표준계약서를 이행하는데 뜻을 모으자고 주장하고 있다. 한연노 관계자는 “신고인이 피신고인과 같이 얼굴을 맞대고 피해를 입증하고 합의해야 하는 절차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며 제도적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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