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1996년 10월 23일 인천 자택에서 살해당했다. 향년 80세. 범인은 ‘백범일지’ 등을 읽고 김구를 존경하게 된 경기 부천의 버스 기사 박기서(당시 46세)였다. 박씨는 미리 파악해 둔 안씨의 집 앞에 잠복했다가 안씨의 아내가 외출하려던 틈을 타 침입, ‘정의봉(正義棒)’이란 글을 새긴 40cm가량의 몽둥이로 안씨를 구타해 숨지게 했다. 범행 직후 박씨는 성당에 들러 고해성사를 한 뒤 경찰에 자수했고, 이례적으로 가벼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년5개월여 만인 98년 3월 1일 사면됐다.
평안북도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안두희는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3년 중퇴)를 다닌 엘리트로, 귀국 후 장사를 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조선 노동당의 지주 탄압을 피해 47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에 가담해 활동했고, 48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이듬해 포병 연락장교(소위)로 임관했다. 확증 없는 설이지만 그가, 관동군 헌병 출신의 특무대(SIS, 기무사령부 전신) 지휘관 김창룡(1920~1956)의 사주로, 경교장의 김구를 권총으로 살해한 것은 1949년 6월 26일이었다.
서청 활동기와 범행 사이 2년여의 행적, 특히 범행 배경은 여전히 모호하다.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켜 김구에게 소개시킨 광복군 출신의 김학규(1900~1967), 서청과 김창룡, 또 그들의 배후인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거론돼 왔다. 그 중 김학규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1961년 5ㆍ16쿠데타 직후 풀려났고, 안두희는 종신형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됐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군에 복귀했고 53년 복권됐다. 저 납득하기 힘든 전개와 이후 안두희의 군납업체 경영 이력 등은 이승만 배후설을 뒷받침했다. 그는 4ㆍ19 이후 신원을 감춘 채 도피생활을 했고, 여러 차례 폭행 등 테러를 겪으면서도 범행 배후에 대해서는 독하게 함구했다.
결코 적지 않은 시민들이 박씨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성금을 냈다. 출소 후 그는 다니던 회사에 복직했다가 택시 기사로 전업했고, 진보 매체들은 ‘안두희를 응징한’ 박씨를 인터뷰해 “인간쓰레기를 청소했을 뿐”이라는 박씨의 말을 제목으로 뽑기도 했다. 여론과 언론, 법원까지 가세한 저 뜨거운 활극의 사료들도 언젠가는 식어 온전한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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