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것이 있다. 원래 죽음의 원인이나 조건 이론 등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죽음학은 다양한 관점에서 임종과 죽음을 연구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지에 대해 집중한다. 사전연명의료 의향서 작성이나 연명치료중단 등 죽음을 앞두고 누구에게나 발생할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준비하자는 것이다. 웰다잉(well dying)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학은 그 동안 병을 고치고 환자를 살리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웰다잉에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다.
▦ ‘죽음학’보다 웰다잉이라고 하면 거부감이 좀 덜하지만, 어차피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편히 간다’는 의미로 ‘웰고잉(well goin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사용하면 어떨까 한다. 일본에서는 슈카츠(終活ㆍ종활)라고 한다. 암환자이자 ‘죽음학 전도사’인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는 저서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에서 ‘죽음’이란 단어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한 구청 강연에서 제목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결재가 나지 않았지만, 이를 웰다잉으로 바꿨더니 결재가 났다.
▦ 그리스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인간 티토노스를 불사(不死)의 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불로(不老)의 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 바람에 티토노스는 죽지 않고 점점 늙어만 가다 매미로 변했다. 죽지 않는 것이 축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올해 2월 존엄사법이 시행된 이후 임종 문화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가 2만 명을 넘어섰다. 생명연장을 위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투여 등을 거부했다는 얘기다.
▦ 하지만 환자 본인의 뜻으로 중단한 경우는 33%에 불과했고 가족의 뜻에 따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써서 등록한 사람은 6만명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성인 인구가 4,000만명을 넘으니 0.1%에 불과하다. 제도적 뒷받침도 부실하다. 환자의 뜻을 모를 때는 손자를 포함한 가족 전원합의가 필요한 것도 문제다. 상당수 의료기관과 요양원에는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는 윤리위원회조차 없다. 서둘러 법을 보완해 연명의료 중단 절차를 훨씬 간소화하고 호스피스 병상 등 인프라도 늘려야 한다.
조재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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