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해 심각할수록 신중한 접근 필요
‘선한 의도’가 부작용 정당화 못해
시민사회 공론장까지 벨 작정인가
거짓말과 혐오 선동을 일삼는(지금도 여전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유럽 각국에서의 극우세력 발호,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들로 점철된 2016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그 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진실은커녕 사실조차 따지지 않고 간단히 무시되는 현상을 일컫는 이 말은 인류 역사의 한 장을 명명하는 시대 정의(定義)로 등극한 듯하다. 그 부산물인 가짜 뉴스(fake news) 범람과 함께.
여기, 조금 다른 목소리가 있다. “만약 지금이 탈진실의 시대라면 진실의 태평성대는 정확히 언제였나? 1980년대였나? 아니면 1950년대? 1930년대? 탈진실의 시대로 넘어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인터넷인가? 소셜미디어인가? 푸틴과 트럼프의 부상인가?”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신간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하라리는 “역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정치 선전과 거짓 정보는 새로운 게 아니”고,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것도 무엇보다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며,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그가 진실 따윈 없다거나 가짜 뉴스를 대수롭지 않다 여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허구와 실체를 구분하기 위해 더 열심히 분투하라고, 특히 과학자들에게 ‘중립을 가장한 현실유지 편들기’인 침묵을 깨고 공적 토론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라고 독려한다. 다만 명심할 것이 있다. 그러려면 먼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인정하고, 사안의 복잡성을 망각한 채 “더 없는 순수 대 사탄과 같은 악”의 대결 같은 손쉬운 이분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와의 전쟁’이라도 벌일 듯한 정부의 움직임에 우려가 앞서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박상기 법무부장관이 16일 ‘허위조작정보 엄정 대처’ 방안을 내놓았다. ‘민주주의(알 권리) 교란’ ‘배후에 숨은’ 등 발표자료를 뒤덮은 서슬 퍼런 활자들에선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논란 많은 ‘가짜 뉴스’ 대신 ‘허위조작정보’를 겨냥하고 실수로 인한 오보나 근거 있는 의혹 제기, 의견 표명은 제외했다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객관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정보를, 더구나 고소ㆍ고발 전이라도 적극 수사할 ‘허위성이 명백하고 중대한 사안’을 판단할 기준은 무엇이며 주체는 누구인가. 박정희 정권 시절 수시로 때려잡던 ‘유언비어’나 ‘사이비 언론’과는 어떻게 다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르르 떨며 엄단을 지시한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성 발언’과는 무엇이 다른가.
가짜 뉴스를 매섭게 질타하던 야당이 돌연 “민주주의 말살 음모”를 외친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공수를 바꿔 되풀이되는 이 정쟁의 연료는 권력의 오만이다. (내가 하면) 사실과 의견, 주장이 섞이기 마련인 어떤 언명에서 ‘의도적으로 조작’한 정보를 ‘표현의 자유’란 살점은 단 1그램도 건드리지 않고 발라낼 수 있다는 착각, 나아가 (나의) 의도는 오로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선의’라는 자만 말이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을뿐더러, 선함은 권력이 자칭할 말이 아니다. 하라리를 다시 인용하면 “손에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처럼 보인다. 수중에 권력이 있으면 모든 것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현 정부가 섣불리 꺼내 든 범죄화의 칼날이 향할 곳은 더러운 가짜 뉴스만이 아니다. 대통령이 수시로 상기하는 ‘촛불혁명’을 배태한 시민사회 공론장도 그 칼날에 베일 수 있다. 진실은 무언가를 박멸한다고 쟁취되는 게 아니다. 공론장에서의 주장과 반박, 재반박을 거듭하며 비로소 드러나고 단단해진다. 권력의 개입은 피하거나 최소화해야 마땅하다. 그걸 잠시 잊었다면 다시 새기고, 동의할 수 없다면 더는 촛불을 입에 올리지 말기를 바란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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