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슈트(Angelsuit)’를 입은 박채이(11)양이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이익” 소리가 났다. 양쪽 무릎과 골반 옆 구동모듈 속 초소형 모터와 기어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재활병원 2층 치료실에서는 어린이 장애인용 웨어러블 로봇 임상시험이 긴장 속에 진행됐다.
채이는 이분척추증을 앓고 있다. 척수관을 포함한 척추 일부의 선천적 기형과 결손으로 배뇨ㆍ배변장애, 다리 변형으로 인한 보행장애를 유발하는 난치성질환이다. 유전병이 아니라는 것 이외엔 발병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완치도 불가능하다.
이날 휠체어를 타고 치료실에 들어선 채이도 물리치료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후 엔젤슈트를 하반신에 착용했다. 엔젤슈트는 로봇 스타트업 엔젤로보틱스(전 SG로보틱스)가 개발한 착용형(웨어러블) 로봇이다. 웨어러블 로봇은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여러 분야 중에서도 성장 가능성이 큰 분야로 꼽힌다. 시장조사기관 BIS리서치는 전 세계 웨어러블 로봇 시장 규모는 2016년 9,600만 달러(약 1,080억원)에서 2026년 46억5,000만 달러(약 5조2,359억원)까지 성장할 것이라 전망한다. 각종 센서ㆍ자율주행ㆍ사물 인터넷ㆍ인공지능 등 여러 분야의 핵심 기술이 결합해야 하며, 재활ㆍ의료용을 비롯해 산업용ㆍ군사용 등 적용 분야도 무궁무진하다.
채이가 치료실 안에서 20여m를 걷는데 처음에는 약 2분이 걸렸다. 엔젤로보틱스 연구진은 한 차례 보행이 끝날 때마다 로봇에 장착된 센서들이 측정한 근력과 산소소모량 등의 데이터를 꼼꼼히 확인했다. 연구진이 모터의 구동력을 조금 높이자 같은 거리를 걷는 시간이 1분 15초로 단축됐다. 채이는 “슈트가 걷는데 필요한 힘의 60~70%는 내는 것 같다”며 “혼자서 걷는 느낌이 드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엔젤로보틱스가 세브란스 재활병원과 함께 국내 최초의 웨어러블 로봇 임상연구를 진행 중이다. 소아 재활용 웨어러블 로봇 상용화 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산업용 웨어러블 로봇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소아 재활용 웨어러블 로봇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지난해 말 미국 보건의료연구원(NIH)이 공개한 소아용 로봇은 배터리가 로봇 외부에 있어 혼자 걸을 수 있는 웨어러블 형태는 아니다.
국내 기술로 소아 재활용 로봇을 개발하는 데는 채이의 도움이 컸다. 지난해 말 엔젤슈트 초기 모델 개발이 시작됐을 때 연세대 의대 재활의학교실 나동욱 교수는 조심스럽게 채이에게 임상시험에 참여하겠는지 물었다. 엔젤로보틱스 최고전략이사를 맡고 있는 나 교수는 채이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소아재활 전문의다.
부모와 상의하며 한동안 고민하던 채이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한번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채이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부터 병원에 다닌 아이라 또래 장애인들의 어려운 현실을 봐왔다”며 “쉽지는 않겠지만 로봇의 도움으로 걷게 된다면, 비슷한 장애인 친구들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평행봉에서 걸음을 옮기는 등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여름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엔젤슈트를 활용한 보행 연습이 시작됐다. 보행 연습은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동안 계속됐다. 휠체어에 의존했던 채이는 엔젤슈트를 착용하고 6분간 약 100m를 혼자 걷을 수 있게 됐다. 다른 보조기와 목발 등에 의지해 걸을 때보다 산소 소모량으로 측정한 에너지 사용량이 40% 정도 줄었다. 채이는 “장애가 있는 친구들 모두 나를 응원하고 있다”며 “내가 꼭 성공해서 장애인 친구들이 보다 편리하게 엔젤슈트를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바르게 걷는 자세를 알게 된 것이 채이에겐 가장 큰 기쁨이다. 다섯 살 때부터 보행장애가 온 채이는 휠체어에 의존하기 전에도 엉덩이를 뒤로 빼고 걸어야 했다. 처음 정상 보행을 경험한 뒤 채이는 “몸이 시원하다”고 어머니에게 수줍게 그 기쁨을 표현했다.
엔젤로보틱스는 채이가 엔젤슈트에 완전히 적응하면 그간 축적한 보행 데이터를 토대로 알고리즘을 개선해 지팡이 없이 걷는 단계로 들어갈 계획이다. 보행 연습 과정에서 채이가 지적한 경량화 등 개선사항을 반영해 더욱 진화한 슈트 개발도 마쳤다. 보행 연습에 사용 중인 엔젤슈트는 약 10㎏인데, 몸무게가 40㎏인 채이에겐 아직 버거운 무게다. 엔젤로보틱스 연구진은 “구동력은 물론 로봇 구조와 장착 부위 등에 대해 꼼꼼히 지적을 해준다”며 “채이가 연구를 주도하며 우리를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세브란스 재활병원은 채이에 이어 뇌성마비 환자용 웨어러블 로봇 임상연구도 시작할 계획이다. 같은 구조의 로봇이라도 작동 방법과 알고리즘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기대와 걱정이 공존하는 도전이지만 성공한다면 1,000명당 두 명꼴로 발병하는 뇌성마비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나 교수는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게 목표이지, 장애가 100% 낫는 것은 아니다”고 거듭 강조했다.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에게 혹시 과장된 ‘희망 고문’을 안겨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는 “웨어러블 로봇 임상연구는 선례가 없어 모든 게 다 처음”이라며 “앞으로 이런 경험들이 더 많이 쌓여야 한다”고 밝혔다.
그래도 새로운 희망이 움트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채이 어머니는 “도전해 볼 여지가 생겼다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 소아 재활용 엔젤슈트 임상연구 결과는 이달 말 서울 용산구 드래곤시티호텔에서 열리는 대한재활의학회 추계 학술대회에서 발표된다. 올해 5월 출범한 한국재활로봇학회의 다음달 행사에서도 소개 예정이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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