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철도ㆍ도로 연결 착공 계획과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순방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대북제재 완화 분위기를 띄우려는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이 본격 견제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잠복했던 한미간 인식 차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형국이다.
문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제재 완화를 명시적으로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면 유엔 제재 완화를 통해 북한 비핵화를 촉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순방 직전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상태까지 간다면 제재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대북제재 완화를 공론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외교장관과 주미 대사 등 문 대통령의 외교ㆍ안보 참모진도 이전과 달리 대북 문제에서 미국과의 이견을 감추려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적극 행보는 남북 최고위층의 이심전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평가다.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이 종전선언보다 제재완화에 비중을 두면서, 한국도 적극 화답하는 모양새다. 북한을 협상 테이블에 계속 앉혀 놓기 위해서는 북한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은 독자 행보를 걷는 한국을 안팎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외교 채널로 은밀하게 전달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언론을 통해 공개 경고장을 보내는 수순까지 밟고 있다. 문 대통령이 대북제재 해제 여론조성을 유럽 순방에 나선 것에 맞춰서는 대북정책 담당 외교관을 보내 유럽 동맹의 이탈을 막고 나섰다.
미 국무부는 문 대통령의 제재 완화 언급이 나오자마자 16일(현지시간) 미국의소리(VOA) 논평 요청에 응답하는 형태로 “여기까지 온 건 국제사회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완전히 이행했기 때문”이라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이후에나 제재가 해제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고 밝혔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사가 16일부터 모스크바와 파리, 유럽연합(EU)본부가 있는 브뤼셀을 차례로 방문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유럽 각국에 대북 제재에서 이탈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 위한 걸로 보인다. 국무부 관계자는 비건 대사의 러시아 방문과 관련,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또 “미국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제재 이행에 대해 러시아를 포함한 이해 관계국들과 협력해 나가는데 전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중국과 함께 유엔제재 완화 목소리를 내며 북한에 힘을 실어주려는 러시아의 움직임에 제동을 건 것이다.
미국 압박으로 유럽 각국도 ‘비핵화 이전에 대북 제재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어거스틴 산토스 마라버 유엔주재 스페인 대사는 “판문점 선언 이후 조성된 비핵화 과정에 희망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이 희망은 실용주의로 인해 급하게 진행되어선 안 된다”면서 “북한이 완전하고 최종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단계를 밟기 전까지 제재해제를 고려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어드라 플레라이트 유엔주재 리투아니아 대사는 “비핵화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이 돼야 한다”며 “그 전까진 제재가 유지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나라들이 온전히 이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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