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칼럼] ‘스모킹 건’과 허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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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스모킹 건’과 허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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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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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킹 건(Smoking Gun)’이라는 용어는 영국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 1800년대 말에 발표한 단편소설 ‘글로리아 스콧 호(The Adventure of the Gloria Scott)’에서 유래했다. 코난 도일은 이 작품에서 총을 쏜 범인을 ‘연기가 나는 권총(Smoking Pistol)’으로 묘사했다. 이후 권총(Pistol)이 총(Gun)으로 바뀌면서 스모킹 건은 범죄나 사건을 해결할 때 나오는 결정적 증거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총기 소지와 범죄가 흔한 미국에서는 실감나는 용어이지만 문화적 맥락이 다른 한국에서는 ‘결정적 증거’라고 쓰는 것만 못하다.

이 생뚱맞은 용어가 유명해 진 것은 공지영이 김부선의 동의 없이 몰래 녹음한 두 사람의 전화 통화 녹취록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 녹취록의 일부가 10월 4일, 트위터를 통해 유출됐다. 2분 20초 분량의 녹취록에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 지사의) 남성 주요 부위에 동그란 점이 있다. 법정에 갔을 때 최악의 경우에 이야기 하려고 했다.”(김부선) “성추행ㆍ성폭행 사건에서 여자가 승소할 때 상대 남성의 신체 특징을 밝힐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TV에 나가 ‘제가 점 얘기까지 해야 하냐’고 말하면 게임 끝.”(공지영)

이재명 경기 지사의 은밀한 부분에 있다는 신체의 점은 ‘김부선 스캔들’을 끝장내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없으며, 그 점은 이 지사와 불륜을 벌였다는 김부선의 주장을 입증해 주지 못한다. 그 점이 결정적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이 지사와 그의 부인 밖에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애초부터 김부선 스캔들은 이 지사가 그녀와 데이트를 부정한 데서 생겨난 것이지, 점의 유무를 놓고 논쟁한 것이 아니다. 김부선은 9개월 동안 밀회했던 증거를 가져와야지 그녀가 점 얘기를 해야 하는 최악의 경우까지 갔다면, 도리어 자신의 주장이 허언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이런 글을 쓸까 말까 망설이는 10월 16일 오후 4시, 이 지사가 자진해서 신체검증에 나섰다. 피부과와 성형외과 전문의로 구성된 수원 아주대병원 의료진은 신체검증을 마친 뒤 “녹취록에서 언급된 부위에 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동그란 점이나 레이저 흔적, 수술 봉합, 절제 흔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 지사의 신체검증 때 경기도청 출입기자 3명도 함께 참관했다. 김부선의 변호인 강용석은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쌩쇼하는 점명이나 거기 놀아나는 아주대 의사들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쓰고, 공 작가 역시 그날 오후 자신의 트위터에 “(이 지사의 셀프 검증은) 공적인 증거 능력이 없다”라는 게시글을 퍼다 날랐다.

내가 아는 상식은 한국에서 개원한 의사의 진단서는 법적 효력을 가지며, 그들의 검증 역시 증거 능력이 있다. 이재명 신체검증에 참여한 의사들과 기자들이 앞으로 김부선 스캔들의 이재명 측 증인되기를 거부한다면 모를까, 그들이 증인석에 나와 잘못된 증언을 한다면 위증죄를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중차대한 책임을 진 검증인들에게 증거 능력이 부여되지 않을 리 없다. 내가 아는 또 다른 상식은 불륜을 저지른 유부녀와 사문서위조에 가담한 변호사는 교도소에 있거나 적어도 자격 정지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연예인이 벌였다면 당장 밥줄이 끊겼을 텐데, 그들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할 변호사는 멀쩡하다. 1심에서 징역 2년 형을 구형받은 강용석은 곧 1심 선고를 받는다.

사이토 이사무의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할까?’(스카이, 2014)에 ‘허언증’에 대한 항목이 있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와 같이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실패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높이고 “공상에 기초한 개인적 성공담”을 만들어낸다. 타인의 주목을 갈구하는 허언증 환자는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호해주고 대접”해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입장을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과장해서 마치 비극의 히로인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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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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