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회담을 9월 4일 열자고 제의했다. 당사자인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반군을 비롯해 미국, 파키스탄, 인도, 이란 등 12개 주변국이 모스크바의 초청장을 받았다. 이에 탈레반은 맞장구 치며 응했다. 하지만 아프간 사태의 중재자를 자임해온 미국이 퇴짜를 놓자 아프간 정부도 불참을 선언했고 결국 러시아가 회담을 기약 없이 연기하면서 자연스레 흐지부지됐다.
언뜻 해프닝으로 비칠 수 있지만 이면에는 러시아의 넘치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러시아가 탈레반과의 연결 고리를 강화하면서 1989년 철군 이후 30년 만에 다시 아프간에서 존재감을 부각시키며 영향력 확대를 꾀한다는 게 워싱턴포스트(WP)의 분석이다. 아프간 정부군을 지원하는 미국을 향한 맞불 전략이다.
사실 아프간은 러시아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곳이다. 79년 당시 구 소련은 기세 좋게 아프간을 침공했지만 이슬람 무장세력 무자헤딘의 게릴라 전술에 발목이 잡혀 1만5,000명이 넘는 목숨을 잃고 허우적대다 10년 만인 89년 치욕적으로 철군했다. 막대한 전비 등으로 치명타를 입은 구소련은 2년 후인 91년 끝내 붕괴했다.
혼쭐이 난 러시아는 이후 아프간에서 손을 뗐다.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 소탕작전에 나서며 휘젓고 다녀도 방관했다. 적극 동참한 유럽의 동맹국들과 달리 러시아는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는 데 그쳤다.
하지만 아프간의 상황은 혼돈으로 치달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아프간 철군을 선언하며 2014년 이후 군사작전을 사실상 종료하면서 정부군과 반군의 충돌양상은 극에 달했다. 특히 2015년 수도 카불 북쪽 240㎞ 떨어진 쿤두즈가 이슬람국가(IS)에 점령당하면서 러시아의 불안감이 커졌다. 탈레반은 어디까지나 아프간 국경 안에서 정부군과 맞붙는 데 비해, 당시 중동 전역을 휩쓸던 IS는 국경을 무시하고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프간은 러시아 남부의 요충지대인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미국과의 지정학적 대결구도를 감안하면, 쿤두즈 점령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아프간 정부군의 허약한 실상을 확인한 터라 균형 추를 맞추기 위해 러시아는 IS를 제어한다는 명목으로 탈레반에 무기와 자금을 보냈다. 프란츠 클린체비치 러시아 상원 국방ㆍ안보위원회 소속 의원은 “IS 세력이 커진 건 상당부분 미국 지원 덕분이라는 게 우리의 판단”이라며 “미국은 중앙아시아의 혼란을 조장하며 러시아에 막대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탈레반을 은밀하게 지원한 것과 달리, 타지키스탄에는 러시아가 대놓고 물량 공세를 퍼부으며 보란 듯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타지키스탄을 방문해 안전보장을 확약한 데 이어 아프간과의 국경 지역에 병력과 장비를 집결시켜 연합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가뜩이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회원국들은 사전 통보 없는 기습훈련이라고 비판했지만, 러시아는 아랑곳없이 올 초에는 10억달러(약 1조1,280억원) 상당의 무기를 타지키스탄에 지원하며 아프간 공략의 병참기지로 삼고 있다.
미국의 전직 고위 외교관은 WP에 “미국이 자꾸 러시아를 아프간에서 몰아내려 할수록 러시아는 더 까다롭게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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