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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아이를 의자에 묶어놓겠다면 “네~” 할 부모 있을까

입력
2018.10.23 04:40
수정
2018.10.23 10:49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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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돌보기 위해” 문제학생 보조의자 결박… 교육청 축소 급급 

 ‘보는 눈’ 있는 일반학교선 인권논란 우려에 장애아 결박 안 해 

[저작권 한국일보]장애아, 엄마, 세상에 외치다 장애인 학생을 묶어놓는 특수학교_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장애아, 엄마, 세상에 외치다 장애인 학생을 묶어놓는 특수학교_김경진기자

“어머니~ 철수(가명)가 얌전히 앉아있지 않고 돌아다녀요. 철수를 의자에 묶어놔도 될까요?”

학교 담임교사가 이 같은 제안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네~ 그러세요. 말 안 들으면 의자에 결박해 놓으세요”라고 답할 부모는 또 얼마나 될까. 아마 대다수의 경우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펄쩍 뛸 것이다. 학부모회가 소집될 수도 있고, 언론은 인권 문제로 접근해 해당 학교와 교사를 신나게 두드려 댈 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이러한 일이 2018년의 대한민국 특수학교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장애인이니까 말을 안 들으면 의자에 묶여 결박 당한 채 생활해도 괜찮은 걸까. 장애인에겐 인권이라는 게 적용되지 않는 걸까. 모두에게 묻고 싶어진다.

나는 장애 아이의 엄마다. 내 아들은 올해 열 살이 된 지적장애 2급의 발달장애인이다. 장애 아이의 엄마인 나는 ‘보조의자’라 불리는, 학생을 결박하는 도구가 특수학교를 중심으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먼저 A특수학교. 철수 어머니의 전화 내용이 A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어느 날 담임교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엄마는 아이에게 보조의자를 사용해도 되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보조의자라고요? 몸을 못 가누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의자인가 봐요?” 보조의자가 뭔지 모르는 엄마가 교사에게 물으니 그런 것이 아니란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아이가 옆 친구와 문제를 일으키거나 밖으로 나갈 것을 대비해 안전벨트 같은 것으로 아이를 의자에 묶어두는 것이 보조의자란다. 교사가 여학생들을 데리고 화장실을 가면 그동안 교실에 남은 남학생들은 공익요원이 봐야 하는데, 공익을 믿을 수 없으니 차라리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의자에 묶어 놓겠다는 얘기다.

엄마가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교사가 안심시키기 위해 설명을 이어간다. “걱정할 필요 없으세요. 이미 학교에서 5명의 학생들이 보조의자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다만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학생을 결박하면 인권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부모의 동의를 얻어 보조의자를 사용한다는 설명이다.

엄마는 생각한다. 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결국은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구나. 게다가 이미 5명의 학생들에게 사용되고 있다면 ‘문제 학생=보조의자 결박’이라는 공식이 학교 내에서 일반화되어 있다는 얘기구나.

이번엔 B특수학교. 나는 특수교사를 대상으로 한 연수에 강사로 나가 부모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어느 날은 수십 명의 교사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조의자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가르치는 학생을 한 명의 ‘사람’이 아닌 ‘장애인’으로 먼저 바라보기 때문에 보조의자와 같은 인권침해 도구들이 사용된다고 했더니 특수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가 손을 들고 반문을 한다. “하지만 보조의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학생들을 잘 볼 수가 없는걸요” 이번에도 교사의 관점에서다. 장애 학생들을 ‘관리’하기 위한 교사의 입장에선 보조의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다음으로 C특수학교. 이곳도 보조의자가 사용 중이다. 한 가지 특이한 건 보조의자에 바퀴가 달렸다는 것이다. 담임교사 말을 안 듣고 문제행동을 보이는 학생을 바퀴 달린 의자에 앉혀 묶는다. 꼼짝 없이 결박 당한 학생의 의자를 교사나 공익요원 등이 밀고 다니며 교실에서 교실 간 이동을 시킨다.

신체 건강하게 잘만 뛰어다니는 청소년이다. 이동 시에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수업 중에도 묶여 있다. 그래야 교사가 편할 테니까. 그 의자는 그 학생의 지정석이다. 혹시 부모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자식을 의자에 묶어도 된다고 부모가 허락을 했다고 한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이곳은 오직 장애인끼리만 모여 있는 특수학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매일 마주하는 학생들이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발달장애인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 현장에서마저 장애 학생들을 ‘학생’이기에 앞서 ‘장애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냥 ‘사람’이라면, 평범한 보통의 ‘학생’이라면, 교사가 학생을 의자에 결박하면서도 인권 문제에 신경이 쓰일 테지만 ‘장애인’이니까 말을 안 들으면 의자에 묶어놔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선 이런 일들이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질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또 하나 있다. 일반학교에 재직 중인 특수교사들은 보조의자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과거 80년대에나 사용하던 물건 아니었어요?”라는 일반학교 한 특수교사의 답변에 깜짝 놀랐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온다. 내 아들은 일반 초등학교를 다니다 특수학교로 전학을 왔기 때문에 두 학교의 서로 다른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일반학교에서는 학교 안의 전교생이 걸어 다니는 폐쇄회로(CC)TV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집에 가면 매일 엄마에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늘은 누가 어떤 행동을 했고, 선생님이 누구를 혼냈는지 등을 세세히 다 말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 명의 학생이 특수학급 앞을 지나가는데 같은 반 소속이기도 한 장애인 친구가 의자에 묶여 있는 걸 봤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학생의 입을 통해 전달된 이야기는 순식간에 학부모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고 학교와 교사는 곧 인권문제에 휘말릴 것이다.

하지만 특수학교는 CCTV 노릇을 해줄 비장애 학생들이 없다. 학생의 대부분이 의사소통에 애를 먹는 발달장애인이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어떤 수업을 했고 친구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그 내용을 아는 엄마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 아들만 해도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아직 ‘엄마’라는 말조차 할 줄 모른다.

처음엔 이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에 직접 연락을 해서 보조의자 건에 대한 실태파악과 사용금지 등을 요청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어머니가 하려는 일이 특수교사들 기 죽이는 일”이라며 나를 달래고 사건을 축소시키려는 데 급급했다.

정말 이 문제가 제기되면 잘하고 있는 좋은 특수교사들마저 기가 죽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아예 몰랐으면 모르되 알면서도 침묵하는 건 그 행위에 동조한다는 것 아닐까. 고민의 밤이 이어졌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진다. 무려 세 곳의 특수학교에서 발생한 폭행사건. 이제는 특수학교 내부에서마저 자정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시기가 됐다. 그렇다면, 지금이 특수학교가 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면, 바로 이 때 특수학교 내의 왜곡된 인권의식도 새롭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힘들고 아프겠지만 이 시기를 거쳐 특수학교의 교육 환경이 바른 방향성을 찾아갈 수 있다면 이를 위한 잠시의 출혈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요구한다. 교육부는 전국 특수학교를 대상으로 학생을 결박하는 보조의자 사용실태에 대한 전수조사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반드시 전국이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3개의 특수학교는 모두 지역이 다르다. 학교 기자재 구입 명부만 제출받아도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한 사안이다.

특수교사들에게도 바란다. “나는 보조의자 같은 강제적 억압의 도구를 사용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을 더 이상은 묵과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양심선언이라도 이어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부모들에게도 바란다. 만일 비장애 자식이라면 학교에서 묶어놔도 되겠냐고 전화가 왔을 때 얼마든지 그러라며 허락을 할까. 그 어느 비장애 학생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학교에서 몸을 결박 당한단 말인가. 왜 비장애 자식에겐 안 되는 일을 장애인 자식이라고 허용한단 말인가. 그것도 부모인 우리가.

신체를 때리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다. 몸을 결박하는 것도 엄연한 학대다. 아무리 교육이라는 목적을 앞세운다고 해도 묶이고 결박 당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러한 교육에 당당히 ‘NO’라고 외치겠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학대당해도 좋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2018-10-16(한국일보)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2018-10-16(한국일보)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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