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정책도 시스템의 힘 앞에선 허약
본질 비켜간 부동산∙교육 정책 마찬가지
잔혹한 시스템만 지속하게 만든건 아닐까
최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거리예술가로 알려진 뱅크시의 작품이 15억원에 낙찰되는 바로 그 순간 파쇄되는 일이 일어났다. 다음 날 뱅크시는 액자 안에 파쇄기를 설치했던 동영상을 올려서, 자신이 예술시장을 조롱하려는 퍼포먼스를 준비했음을 시사했다. 그래서 그의 항의는 제대로 먹혔을까? 액자 속 그림은 철저하게 파괴되는 대신에 반 정도만 ‘질서 있게’ 파쇄되었고 따라서 상품 가치는 사라지는 대신 오히려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사건으로서 미술사에 한 자리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작품을 돈으로 여기는 예술시장을 조롱하려면 작품을 더 망가트려야 했다. 낙찰자도 ‘멋있게 망가진’ 그림을 그대로 구매하겠다고 했다. 작가의 의도가 예술시장의 조롱이라고 하더라도, 시스템은 그것을 흡수한 채 굴러간다. 개인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또는 선의로 예술시장 안에서 항의하는 일은, 비록 파괴적인 퍼포먼스로 의도되었더라도, 다시 상품으로 소비된다.
냉정하게 관찰하자면 예술시장은 이제 보통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고급 갤러리와 미술관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돈 잔치로 보인다. 예술시장 안에서 예술의 이름을 빌린 항의는 시스템을 살짝 흔들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조금 차이는 있지만 지식인들의 합리적 항의나 정책에도 해당한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의 필요성을 연구한 윌리엄 노드하우스 및 폴 로머에게 돌아갔다. 특히 노드하우스가 주장한 ‘글로벌 탄소세’는 개별 국가들의 노력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글로벌 생태 문제를 해결하려는 합리적인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합리적인 정책은 실행 가능한 대안일까? 한동안은 실현하기 어려운 정책으로 보인다. 쉽게 국가들의 이기주의 탓을 할 수도 없다. 역사적 발전 과정을 고려하면 후진국일수록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구의 탄소 배출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드하우스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이산화황 배출권 거래가 가능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루어졌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산화황 배출권 거래는 미국에서만 상대적으로 효과를 보았다. 또 미국이 특별히 생태적 관심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 정치경제적 상황이 미국으로 하여금 그렇게 유도한 면이 컸다. 여기서도 합리적인 접근이나 정책은 성공과 거리가 멀다. ‘자살 경제’라고 불릴 정도로 잔혹한 현재 경제 시스템 앞에서 글로벌 탄소세처럼 선의에 호소하는 것은 그저 학자들의 순진함일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는 학자들의 제안은 마치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정말 그럴까?
서울을 비롯한 세계 많은 대도시의 부동산가격이 폭등하면서 자산의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정책이나 대안은 점점 무력해지고 있다.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며 스펙 경쟁이 치열해지고 인구가 줄어드는 와중에서도 젊은이들이 서울로 점점 더 유입되는 상황에서, 세금을 비롯한 합리적인 정책은 제한된 효과밖에 가지지 못한다. 세금을 더 강력하게 부과하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실질적인 지역 분산과 같은 강력한 대응책이 없는 한, 현상 유지를 할 뿐이다. 그런데 강력한 지역 분산은 불안이나 거부감 또는 불확실성을 야기하며, 정부는 겁을 낸다.
기존 교육 정책을 부분적으로 땜질하는 수준에서는 교육의 잔혹함이라는 큰 문제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교육부의 정책은 경쟁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그것을 이리저리 합리화하는 수준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시스템들은 잔혹하게 굴러가고, 그 와중에서 사람들은 어쩌지 못한 채 각자도생에 익숙해진다. 그 사이에서 합리적 항의나 정책에 호소하는 일들은 쓸모없거나, 심지어 잔혹한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게 돕는다. 항의와 대안 정책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스템은 그저 나쁜 놈일 리 없고, 민주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잔혹한 세상은 합리적 정책과 선의를 먹고 산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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