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에 年2조 정부 지원 불구 통일된 회계프로그램 없어
“엄마 없는 시간 우리 아이 잘 돌봐달라고 준 돈으로 사리사욕을 채웠다니 기가 막힙니다.”
일곱 살 딸을 부산의 한 사립유치원에 보내는 학부모 A씨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아이 유치원은 전국 17개 시ㆍ도교육청 감사에서 비리 혐의로 11일 명단이 공개된 사립유치원 목록에 버젓이 이름이 올라 있었다. A씨는 딸이 유치원에 다닌 3년 동안 학기마다 A4 용지 등 교육과 무관한 준비물 제출을 강요당했다고 지적했다. 원장은 용도가 불분명한 회비 명목으로 매달 15만원도 받아 챙겼다. 그는 “유치원 측은 학부모 전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며 정부에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비리 유치원 실명 공개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1,878곳, 5,951건(269억원)이라는 적발 규모는 물론이거니와 상식을 뛰어 넘는 심각한 비리 백태에 교육기관의 도덕적 책무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거세다. 특히 적발 유치원의 95%(1,085곳)가 사립으로 드러나 법ㆍ제도 테두리에서 비껴난 사립유치원의 불투명한 회계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도 덩달아 커지는 모습이다.
주말 학부모들이 자주 찾는 온라인 맘카페와 국민청원 게시판은 사립유치원을 성토하는 목소리로 온종일 들끓었다. 유치원 카드로 명품가방과 성인용품을 구매한 원장, 교육업체와 짜고 1,000만원이 넘는 물품대금을 빼돌려 쌈짓돈처럼 쓴 유치원 등 이들의 비위 수위는 국민의 눈높이에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아들을 서울의 한 사립유치원에 보내는 학부모 김은정(36)씨는 14일 “이번 감사에는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수시로 돈을 걷어가는 행태로 봐서 아이 유치원도 불법이 개입됐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며 “시ㆍ도 교육청에 맡기지 말고 교육부가 직접 나서 전수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부모는 “딸 유치원이 급식비 운영이 문제가 돼 행정처분을 받았다고 들었다”며 “부정하게 사용한 돈 때문에 아이들이 먹은 음식에 해가 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라고 걱정했다.
명단 공개 여파는 당분간 수그러들지 않을 태세다. 비리 유치원 실명을 폭로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2일 페이스북을 통해 “감사 결과에 불복해 처분이 완료되지 않았거나 소송이 진행 중인 건은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추가로 확보해 제공하겠다”며 2차 폭로를 예고했다. 박 의원실 측 관계자는 “1차에 공개하지 않았거나 법적 다툼이 끝나지 않은 비위 적발 건에 대해 29일 교육부 종합감사 전까지는 공개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1차 공개된 사립유치원 수가 전체 사립유치원(4,220곳ㆍ올해 기준)의 4분의1 수준에 불과한 점을 감안할 때 결과에 따라 후폭풍은 한층 커질 수 있다.
이번 사태는 결국 관행처럼 유지돼 온 사립유치원들의 주먹구구식 회계시스템과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다. 감사에서 적발된 사립유치원들의 내역을 보면 대부분 돈과 관련돼 있다. 서울 B유치원은 물품을 구매한 뒤 대금 일부를 유치원 계좌가 아닌 원장 계좌로 돌려받은 후 세입 조치를 하지 않았다가 경고 처분을 받았다. 정부합동부패척결추진단이 지난해 2월 실시한 유치원ㆍ어린이집 점검 결과에서도 부당 사용한 205억원 중 135억원(65.9%)이 회계집행 기준을 어겨 적발됐다. 기관 운영비를 개인이 사용하거나 물품 구입 시 허위 증빙자료를 제공하고, 또 계약과 무관한 제3자에게 집행하는 등의 수법을 썼다. 정상적인 회계절차만 거쳤다면 상당수는 걸러질 수 있는 비리들이다.
이런 관행을 묵인하기에는 사립유치원에 지원되는 예산은 막대하다. 사립유치원에는 매년 2조원 이상의 지원금이 투입된다. 유치원 한 곳당 5억원에 가깝다. 항목별로 보면 2013년부터 누리과정 지원 명목(유아학비)으로 원아 한 명당 월 22만원, 방과후과정 7만원이 지급되고 있다. 또 월 25만원을 지원하던 학급운영비가 내년부터 40만원으로 인상되고, 교원처우개선비(월 50만원 이상)와 교재교구비(월 10만원) 역시 별도로 주어진다.
그러나 사립유치원의 회계 방식은 여전히 후진적이고 통일된 시스템은 아예 없어 감시망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2015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사립유치원의 50%는 원장이 회계업무를 병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직접 이해당사자인 원장이 예ㆍ결산 수립과 집행을 직접 담당할 경우 당연히 객관성은 침해될 수밖에 없다. 김동훈 유아정책교육연구소 부연구위원은 “사립유치원의 위법 사례 중 다수가 회계관리운영 위반인 점은 전문성 부재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반영, 지난해 ‘사학기관 재무ㆍ회계규칙’을 개정해 유치원 회계 세입ㆍ세출예산 과목을 새로 만들어 올해 3월부터 적용 중이긴 하다. 사립유치원들도 앞으로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을 어디에 썼는지 상세하게 기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다. 공통 회계처리프로그램도 마련 중이지만 집단 휴업을 불사하겠다는 사립유치원들의 반발에 밀려 논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교육부는 이달 중 사립유치원의 회계ㆍ인사 책무성을 강화하는 대책을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다. 시ㆍ도교육청과 협의해 전체 감사결과를 직접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사립유치원들은 여론의 거센 질타에 일단 몸을 낮추면서도 일방적인 매도가 억울하다는 분위기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 관계자는 “단순한 행정실수로 적발된 사례도 많은데 사립유치원 전체를 비리 집단인양 몰아가 안타깝다”면서 “공개 내용을 자세히 분석한 뒤 대응 방침을 정하겠다”고 말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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