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 여름의 패션을 선보이는 파리, 밀라노 등의 주요 패션위크도 일단락 됐다. 이번 시즌에도 다양한 시도들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일하는 ‘사람’을 눈여겨보게 된다.
컬렉션이나 광고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의 변화를 꾀하기도 하지만, 디렉터의 교체는 브랜드를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다. 굳이 창업자의 판단에 기댈 필요가 없게 된 지금은 다양성 확보, 브랜드의 정체성 변화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디렉터를 활발히 교체하고 있다.
창업한 디자이너와의 유기성이 줄어들고 패션 시장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어도 브랜드의 이름을 남길 땐 역시 비용의 문제가 크다. 아무리 큰 회사라고 해도 새로운 브랜드를 디올이나 루이 비통처럼 전 세계적으로 알리고 “고급”, “전통” 등의 이미지를 심는 데는 상당한 홍보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브랜드들도 기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광고와 홍보, 각종 이벤트 등으로 여전히 방대한 비용을 쓰고 있다. 새로운 이름이라면 시간과 비용이 배로 소요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기존 브랜드를 유지하는 게 유리할 수도 있다.
책임자의 교체는 사실 여러 가지 충돌을 야기한다. 원래 가지고 있던 브랜드의 정체성과 새로 영입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에 따라 브랜드의 색은 크게 바뀐다. 게다가 브랜드와 디자이너 양쪽이 다루던 고객층도 다를 수 있다. 누구를 타깃으로, 어떤 정체성을 추구할 것인지에 따라 기존 고객은 떠나고 새로운 고객이 유입된다.
이번 시즌에도 몇몇 대형 브랜드에서 디렉터가 교체됐다. 대표적으로 버버리와 셀린느를 들 수 있는데, 새 수장을 맞이한 첫 번째 컬렉션에서 두 브랜드는 기존과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우선 전통의 영국 브랜드인 버버리를 맡게 된 디렉터 리카르도 티시는 버버리 특유의 포멀함, 펑크와 반항 같은 영국의 청년 문화, 그리고 자신의 패션 기반인 스트리트 웨어나 고딕 등으로 다양함이 공존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끌어냈다. 한때 영국의 서브 컬처가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요즘은 힙합이나 아웃도어 웨어 등 미국의 실용적인 패션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오래된 브랜드에 젊고 신선한 이미지를 보태고 다른 브랜드와의 차별화를 만들기 위해 다시금 영국의 서브 컬처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셀린느를 맡게 된 디렉터 에디 슬리먼은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사실 셀린느는 1930년대에 런칭해 하이 패션 산업의 초창기를 닦은 브랜드지만, 버버리만큼 뚜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전임자인 디렉터 피비 필로도 임명된 후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로 이미지를 구축했다. 셀린느는 이번 교체 이후에도 전임자의 분위기를 완전히 없애고 또다시 새로운 브랜드로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됐다.
문제는 피비 필로의 셀린느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입는 옷’이라는 정체성을 개척해 온 대표적인 브랜드였다는 점이다. 에디 슬리먼은 이런 과거를 지우고 슬림한 드레스, 마른 모델, 높은 힐 등 기존 방식의 하이패션으로 회귀했다. 이는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자기 몸 긍정주의나 다양성 존중 등의 측면에서 보면 명백한 퇴보로 보일 수 있다. 패션계에서도 이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고 있다.
이런 변화에 따라 기존 브랜드는 새로운 브랜드로 바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원래 브랜드의 내용은 의미가 남기도 하고 간판으로서의 역할만 남은 채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하이패션 시장 초기 단계를 지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현재에 와서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브랜드가 어떤 소비자를 선택했는지, 왜 바뀌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왜 지금인지 등을 보며 패션의 흐름과 산업 동향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이보다 앞서 가는 브랜드는 멀리 갈 수 있다. 당장은 큰 비용을 들여가며 브랜드의 힘을 키워놓고 있다고 해도, 이 기본적인 역량이 없다면 구태의연한 이미지 속에서 서서히 잊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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