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등학교 미만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평일 아빠의 양육시간은 고작 46분이다. 반면 엄마는 229분으로 무려 5배나 많다. (보건복지부 2017 저출산ㆍ고령화 국민인식조사 결과) 엄마의 양육부담은 72%이지만 아빠의 양육부담은 21.9%다. (KB금융경영연구소 2018 한국워킹맘보고서) 이런 통계 수치들은 한국에서 육아가 누구의 몫인지 잘 드러낸다.
이뿐이 아니다. 자연분만, 모유수유, 만3세까지 엄마가 기르기로 구성된 ‘애착 3종 세트’와 엄마가 알려줘야 하는 영어, 놀이, 수학, 논술 등 ‘엄마표 학습법’까지 사회 곳곳에서 모성애를 부르짖는다.
최근 이 같은 ‘엄마표 육아’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이 인생에 희생당하지 말고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면서 아이와의 관계 회복에 나서라는 게 요지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육아 에세이를 낸 김경림(‘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의 저자), 신혜영(‘아들! 엄마 좀 나갔다 올게’의 저자), 백미정(‘하루만 엄마로 살지 않을 수 있다면’의 저자) 작가 3명이 한자리에 모여 ‘엄마표 육아’에서 벗어나는 법에 대해 얘기했다.
대세 ‘엄마표 육아’에 반기를 들었다. 도대체 왜
김=엄마표 육아는 아이와 엄마 모두 불행해진다. 경험으로 알게 됐다. 육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첫째 아이가 아홉 살 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다. 그전까지 나도 아이를 잘 키워보려고 좋은 것은 다 시켰다. 똑똑하게 키워서 좋은 학교 보내고, 유능한 사회인으로 만들어야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무너졌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서 그 꿈을 다시 꿀 수 없다는 게 그렇게 속상했다. 아이는 아이비리그 대신 어릴 적 놀았던 시골집 마당을 꿈꿨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산골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영재 소리를 듣는 아이에서 암을 앓는 아이로,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되니 무언가를 계획하고, 내 의도대로 하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지 깨닫게 됐다. 아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나도 엄마표 육아에 맞춰 살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틀에서 나와보니 보이는 게 있었다. 왜 엄마표 육아가 행복하지 않은지 알게 됐다. 그건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아서다. 아이가 나와 다른 사람임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음을 알고 나니 둘 다 행복해졌다. 아이는 장애를 갖게 됐어도 긍정적이고 밝게 세상을 살아간다.
신=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2세 계획이 분명했다. 심지어 이과 유전자가 나에게 부족한 것 같아 아이 아빠가 될 사람은 수학을 잘하는 사람으로 고를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는 게 좋다고 해서 조산원에서 아이도 낳았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는 게 불행했다. 아이 뒷바라지 하느라 내 존재도 잊고 살았다. 그러면서 아이한테는 기분에 따라 화를 냈다가, 즐거웠다가 했다. 어느 날 보니 내가 딱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러고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고민 없이 정해진 틀에 맞춰서 살다 보니 그렇더라. 그래서 아들을 버릴 순 없고 엄마의 역할을 버리고 ‘미니멀 맘’이 되기로 했다.
백=나도 아들 셋 키우면서 사회에서 좋다는 온갖 육아법을 적용해봤다. 엄한 엄마, 부드러운 엄마 다 해봤다. 그런데 뭘 해도 엄마 탓이더라. 아이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다 내 탓이었다. 10년간 우울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니 여유가 생겼다. 내가 여유가 생기니 아이들이 행복해했다. 예전에는 애들이 말썽을 피우면 뭐가 잘못인지, 내가 뭘 잘못했나, 올바른 육아법은 뭔지 한참 생각했다. 내가 잘못 키운 것처럼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니 내가 너무 힘들더라. 그래서 내려놓았다. 뜻밖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와 관계가 훨씬 나아졌다.
그럼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좋은 엄마’인가
김=좋은 엄마는 없다. 좋은 엄마를 찾는 순간, 엄마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밥 해주고, 간식 챙겨주고, 잘 돌봐주고, 잘 놀아주고, 교육 잘 시키고, 아플 때 간호하는 일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건 엄마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다. 흔히 이걸 엄마가 더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걸 잘 하는 건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거다. 엄마는 직업이 아니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좋은지 물어야 된다. 아들에게 물었더니 “좋은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데, 내가 엄마를 좋아하니깐 좋은 엄마 맞다”고 하더라. 그럼 내가 밥 해주고, 좋은 학원에 데려가지 않았어도 나는 좋은 엄마이지 않을까.
신=공감한다. 아이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면 관계가 좋아진다. 친구나 이웃에게 우리는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고, 얘기도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함께 즐거워한다.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대하면 된다. 엄마표 육아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엄마라는 이유로, 내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억압한다. 아이가 잘 커야 하니깐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고 하고, 아이가 똑똑해야 하니깐 영어도 시키고, 중국어도 시키는 거다. 그런데 이게 다 누굴 위해서 하는 건가. 엄마 본인이 만족하기 위해서다. 아이에게 물어봤나. “너 정말 그거 원하니”라고.
김=아침 먹기 싫어하고, 양치질 하기 싫어하는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준다. 존중하되 도와준다. 예를 들어 브로콜리를 안 먹거나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아이에게 굳이 잔소리를 퍼붓지 않는다. 대신 아이의 기질과 특성에 맞도록 환경을 바꾸는 걸 도와주는 식이다. 브로콜리 안 먹는다면 ‘먹어라’ 할 게 아니라 좋아하는 야채를 찾도록 해주는 일, 아침에 안 일어나면 5분씩 일찍 일어나는 법을 제안하면 된다. 아이는 나와 성격이나 취향 등이 완벽히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아이들은 부모와 똑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우리의 부모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봐라. 다르지 않은가. 아이들에게 부모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아야 된다.
백=세 아들을 키우는데 각각 대하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첫째는 식탁 끝에 젓가락을 모두 가지런히 맞출 정도로 강박이 심하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라면 간섭하지 않고, 아이에게 왜 그런 행동이 잘못됐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려고 한다. 둘째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이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낼 때 단호하게 훈육한다. 셋째는 화가 풀릴 때까지 좀 내버려둬야 하는 아이다. 내가 낳은 자식인데도 아이들마다 관계가 다 다르다. 만약에 첫째 아이에게 대하듯이 둘째에게 말로 설득하려 하면, 아이는 엄마 말을 무시한다. ‘첫째는 안 그런데, 둘째는 왜 그럴까’ 이런 잣대를 들이대면 아이와 엄마 모두 힘들어진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봐야 한다.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훈육은 어떻게 하나.
김=방치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다르다. 존중한다는 것은 아이가 필요한 것, 원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함께 해준다는 얘기다. 암으로 시력 장애를 안고 사는 첫째는 학교를 아홉 번이나 옮겼다. 일반학교, 특수학교, 대안학교, 기숙학교, 정말 수도 없이 옮겼다. 처음에는 아이가 상처 받지 않을까 두려워 특수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가 일반고를 선택했다. 힘들 거라고 얘기해줬다. 실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고발하면 아이의 학교생활이 힘들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고발을 선택했다. 판단을 존중했고, 아이도 나도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 정당한 사과를 받았고, 아이는 받아들였다. 엄마 역할은 거기까지다. 도와주는 것, 판단할 수 있게 알려주는 것이다. 엄마표 육아는 부모가 지레짐작으로 아이의 기회를 차단한다. 그 안에는 상처받지 않는 것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아이가 단단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부모는 그런 걸 같이 극복해주고 위로하면 된다.
백=엄마표 육아도 아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엄마가 정해놓은 답이 있다. 다른 선택을 하면 화를 내거나 옳지 않다는 식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둘째가 받아쓰기에서 늘 20점을 받아왔다. 그러면 나는 점수보다 아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같아 화가 난다. 물론 아이에게 화를 내지는 않지만, ‘엄마는 네가 최선을 다해서 점수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나는 이게 훈육이라고 생각한다.
신=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엄마가 정한 기준 아닌가. 아이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일 수도 있다. 훈육을 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이게 나의 기준이나 감정에 따른 훈육인지, 아이에게 필요한 훈육인지 말이다.
김=엄마들마다 육아의 우선순위는 따로 있을 거다. 나는 ‘안전’이다. 미성년자인 둘째가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오겠다고 통보했다. 이건 허락하지 않는다. 안전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신 같이 갈 어른이 있다면(내가 해줄 생각은 없다) 허락해주겠노라 했다. 어딜 가면 전화해서 소재와 안부를 확인하는 것, 차에 타면 안전벨트를 하는 것 등 안전과 관련된 게 아니면 훈육할 게 별로 없다.
신=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주기가 어렵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훈육이 아니라 가르쳐야 한다. 예컨대 밥을 돌아다니면서 먹으면 아이에게 ‘자리에 앉아서 먹어’라고 하기 보다 아이가 돌아다니면서 먹는 원인을 파악해서 알려줘야 한다. 아이가 앉아 있기 어려운 이유가 분명히 있다. 자리가 지루하거나, 배가 고프지 않거나, 밖에서 놀고 싶거나 등등이다. 그걸 나의 기준에 맞춰서 앉혀서 먹는 게 아니라, 잠깐 나갔다 오든지, 아이의 입맛에 맞는 걸 찾아줘야 한다.
그렇다면 엄마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
신=아이와 관계를 잘 맺는 것만으로도 좋은 엄마는 충분하다. 인생을 80년이라고 보고 사계절로 생각해보자. 육아를 하는 대략 20년, 내 인생의 여름만 엄마의 삶이다. 가을과 겨울이 남아있다. 엄마가 아닌 나를 돌봐야 한다. 누구보다 스스로 행복해져야 한다.
백=그렇다. 내가 생각했을 때 좋은 엄마는 ‘나는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위해 원피스를 사는 엄마다. 말이 쉽지 하기 정말 어렵다. 엄마가 되면 나의 행복을 까맣게 잊고 산다. 당장 세 명의 아이가 매달린다. 그러다 보면 감정조절도 쉽지 않고, 아이가 잘되는 것만이 나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잘되면 다행이지만, 십중팔구 다른 아이가 될 확률이 높다. 그러면 불행해지고, 이미 돌이키기엔 늦으니 악착같이 더 매달리게 된다. 늘 인생의 중심에 엄마가 아닌 나를 둬야 한다. 그래야 아이와 엄마 모두 행복해진다.
김=엄마 이전에 나는 어떤 인간인지 고민해봐야 된다. 좋은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정말 수천 개가 넘을 거다. 엄마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야 진정 엄마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 답을 구할 수 있다. 내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어떤 어른으로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해야 하고, 작은 일부터 몸소 모범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걸 아이는 보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어떤 터전과 사회를 물려줄 수 있을지 한번쯤은 고민해야 한다. 같이 살면서 어른으로서 보여주는 엄마가 돼야 한다.
신=헬리콥터맘(헬리콥터처럼 자식 주변을 맴돌면서 온갖 일을 참견하는 엄마), 돼지맘(교육정보 공유를 위해 다른 엄마들을 이끄는 엄마), 캥거루맘(자식을 품에 끼고 무엇이든지 다 해주는 엄마)들은 알아서 거리를 좀 두시는 게 좋겠죠?
진행ㆍ정리=강지원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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