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 구 소련의 영향력에 놓였던 동부 유럽국가에서 ‘친(親) 러시아’ 분위기가 뚜렷해지고 있다. 발트해 연안의 소국 라트비아 총선에서 친러 정당이 최대 득표율을 기록하는가 하면,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 대선에서도 친러ㆍ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표방한 후보가 ‘대통령 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됐다.
7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전날 치러진 라트비아 총선에서 친러 좌파 성향인 화합당이 가장 높은 19.8% 득표율을 기록해 제1당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반유럽연합(EU) 성향 우파 포퓰리즘 반체제 정당 ‘누가 국가를 소유하는가(KPV LV)’와 반부패를 주창한 새보수당이 각각 14.25%와 13.6%를 득표해 뒤를 이었다. 현재 집권세력인 중도우파 3당(녹색농민당, 국민연합, 통합당) 득표율은 총합 27.6%에 그쳐 정권을 내줄 위기에 처했다.
이런 결과는 화합당이 ‘블라디미르 푸틴의 도구’라는 이미지를 벗고,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의 변신을 꾀한 노력 덕분으로 해석된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라트비아(인구 200만명)는 라트비아계가 57%, 러시아계는 약 30% 정도다. 러시아계를 주요 지지층으로 삼는 화합당은 사회에 퍼져 있는 ‘러시아 견제’ 심리를 감안, 대러 제재 해제를 촉구하면서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와 EU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급진 친러 단체들의 요구는 거부하는 행보를 보여 왔다.
닐스 우샤코프 화합당 총재는 “정부 구성의 문이 열렸다”며 “화합당 없이는 어떤 안정적인 연정 구성도 불가능하다”고 승리를 선언했다. 연정 협상 파트너로는 우선 ‘라트비아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는 배우 출신 아르투스 카이민스가 이끄는 ‘KPV LV’가 거론되고 있어, “라트비아에도 포퓰리즘 바람이 불어 닥쳤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이날 치러진 보스니아 대선에서도 친러 물결이 거셌다.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인 밀로라드 도디크, 보스니아계 세피크 자페로비치, 크로아티아계 젤코 콤시치가 차기 3인 공동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이 가운데 도디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인물이다. 득표율 56%(개표율 85%)를 기록, 경쟁자인 믈라덴 이바니치 현 대통령을 누른 그는 “나는 분명히 승리했고, 세르비아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분쟁과 갈등의 역사가 깊은 이 나라는 주요 민족ㆍ종교를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을 선출, 8개월씩 번갈아 국가 원수를 맡도록 하고 있다.
이로써 동유럽 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와 EU 간 경쟁은 더욱 격화할 전망이다. 뉴욕타임스는 라트비아 총선 결과에 대해 “주류 정치인들에게 심각한 타격이며, 친모스크바 정당을 포함한 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길이 마련됐다”고 전했다. 보스니아 대선과 관련해서도 “모스크바는 이 나라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면서 EU 가입을 저지하고, 나아가 유럽 주변부에 대한 영향력도 증폭시키게 됐다”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동유럽 침투’는 이뿐이 아니다. 앞서 지난달 말 마케도니아의 국호 변경을 위한 국민투표도 과반에 못 미친 투표율(34.59%) 탓에 법적 구속력을 얻지 못했는데, 러시아는 ‘북마케도니아’로의 국명을 바꾸는 데 반대한 세력들을 물밑에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케도니아의 EU, 나토 가입 전제 조건이었던 국호 변경을 무산시키려 했던 것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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