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역시 변하질 않아.’ 종종 하는 말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싫어지게 만드는 말이다. 과연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복음서 기자 마가는 예수 제자들을 날것 그대로 잘 알 수 있었다. 동역하던 베드로로부터 예수 제자들에 대한 생생한 뒷담화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다듬어지지 않았던 인성에 대해 유독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의 제자 중 형제간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기록에 남겼다.
◇예수 “종이 되어라”
어느 날 예수는 자신이 어떻게 배반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인지 제자들에게 예고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비통해 있을 예수에게 야고보와 요한이 와서는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마가복음 10:37) 제자들을 데리고 3년간 동고동락했던 스승에겐 절망에 가까운 제자들의 행동이었다.
곧 이은 상황은 거의 재앙이었다.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이 염치없는 두 형제에게 화가 나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구제불능 제자들 틈에서 예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아마도 제자들이 평생 잊지 못했을 훈계였을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10:43-45) 스승 덕에 우의정 좌의정이 되어 권세를 누리겠다고 서로 싸울 때, 스승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 종이 되어 목숨도 내어주겠다고 했다. 일순간 제자들은 얼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떠난 후, 정말로 답이 없을 것 같았던 제자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제자들 가운데 으뜸이 되고자 욕심을 냈던 야고보는, 역설적으로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순교자가 되었다. “이 무렵에 헤롯 왕이 손을 뻗쳐서,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하였다. 그는 먼저 요한과 형제간인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사도행전 12:2) 제일 인간적 욕심이 많았지만, 제일 먼저 그 욕심을 버린 제자가 되었다. 같이 욕심을 부렸던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는 달리 제일 오래 생존한 제자가 되었다. 권세를 누리고자 했던 욕심과는 반대로, 어느 섬에 유배되어 외로운 생존을 하면서 성서의 맨 마지막 책을 저술했다.
◇다시 태어난 베드로
베드로야 말로 변화의 산 증인이다. 말과 행동에 주의력 결핍이 있어 보이던 베드로가, 후에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그 어떤 제자보다도 권위 있는 사도가 되었다. 말과 행동에도 주의력이 깊었다. 대사도인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불러 놓고는 토론을 주관할 정도였다.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로 알려진 이 모임에서, 유대인의 옛 관습이었던 할례가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필수 증표가 아니라는 과감한 선언을 이 베드로가 한 것이다. 코미디언에 가까웠던 베드로였지만, 말 그대로 그는 다시 태어났다.
제자들의 변화는 언제 일어난 것일까? 흥미롭게도 스승 예수로부터 직접 훈련 받을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승이 죽은 후 도망가 있다가 그들에게 두 가지 큰 일이 생겼다. 먼저,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을 체험하였다. 그러고 나서 직접 거리로 나가 스승의 분부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 두 요소는 어설프고, 겁이 많고 이기적이었던 제자들을 크게 변화시켰다. 배운 것을 실천하여 보니, 그들에게 변화가 온 것이다.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가 베드로를 찾아갔다. 두 사제 간의 마지막 기억은 그야말로 베드로의 수치 자체였다. 제자 모두가 스승을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의 예고에, 베드로는 당당히 소리쳤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 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복음 26:33)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때도 말만 앞섰다. 정작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갔다. 다시 찾아 온 예수 앞에 베드로는 고개나 들 수 있었을까.
이때 예수는 베드로에게 짓궂은 ‘보복’을 하신다. 생전에 베드로 때문에 많이도 당혹해 하셨는데, 이제 기회가 온 것이다. 베드로에게 네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자기는 절대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줄행랑을 쳐버렸기에, 베드로에게는 진땀 나는 질문이었다. 사랑하는 것을 스승께서 잘 아시지 않으냐며 베드로는 겸연쩍게 대답했다.
◇예수, 베드로에게 행동을 요구
대답 후 곧장 베드로는 사과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늘 말부터 빨리 한다는 것을 경험상 아주 잘 알던 예수였다. 그래서 베드로보다 더 빨리 입을 여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요한복음 21:15) 그리고는 또 다시 베드로에게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같은 질문을 또 하시니, 적잖이 당황스러운 시추에이션이다. 베드로 때문에 예수는 여러 번 겪으셨던 상황이다.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다시 대답을 했고, 이번에도 베드로가 입을 떼기 전에 예수는 똑 같은 명령을 한다. “내 양 떼를 쳐라.”
그리고는 또 다시 도망가 버리고 싶은 순간이 베드로에게 왔다. 예수가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신 것이다. 아시겠지만 3은 베드로가 가장 싫어하는 숫자다. 베드로는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1:17) 여전히 똑 같은 명령을 예수는 ‘세 번째’ 하신다. “내 양 떼를 먹여라.”
제자 베드로에게 스승 예수가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예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베드로야, 네가 정말로 날 사랑하지? 나도 잘 알아. 그런데 그러고도 나를 배반했으니 미안하지? 그래서 나한테 죄송하다고 사죄하고 싶겠지만, 늘 그렇게 말만하면 뭐하니. 너 말 잘하는 건 내가 잘 알지. 평소에 늘 그랬으니까. 그래서 나한테 더 죄송스러워 죽겠지? 그러니까, 정말 죄송하면 이번에는 내 부탁을 꼭 들어줘. 말로만 말고 진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 가서 내 양떼를 먹여줘. 부탁이다. 이게 네 인생 소명이야. 가서 많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기 바란다. 나의 사랑하는 베드로야. 입으로만 말고 삶으로 보여줘.’ 짓궂은 방식이었지만 베드로에게는 강렬한 교육이었다.
◇말이 아닌 실천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다. 배운 지식은, 그것을 가르치다 보면 가장 잘 알게 된다. 책상에서 연구한 것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강의실에서 직접 가르쳐 보아야 한다. 머릿속의 정보가 소위 산지식이 되는 것이다. 실천이 요구되는 지식은 더 그러할 것이다. 야구를 교실에서 배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운동장에 나가 배운 것을 해보아야 야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교회에게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했던 것과 같은 분부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지금껏 말만 잘 해왔다면, 이제는 교회 밖으로 나가 실천하라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떻게 가장 잘 알 수 있을까? 가서 이웃을 직접 사랑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자신과 교회는 어떻게 변화 할 수 있을까? 가서 이웃과 사회를 변화시킬 때, 스스로도 변화를 경험 할 것이다.
생전에 예수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6:18) 농담이지만 그래서 교회가 베드로 같은가 보다. 말만 앞서던 베드로가 스승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자 변화가 왔다. 교회가 변화하려면, 그 답은 당연히 베드로에게 있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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