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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과실 독식하려다 벤처 죽인 원자력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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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과실 독식하려다 벤처 죽인 원자력연구원

입력
2018.10.10 04:40
수정
2018.10.10 14:0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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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주처, 빠진 기업들 이유로 수주 중단… 3년 계획 과제가 1년 만에 종료

원자력연 “기간 줄었지만 사업 성공, 발주처 인사 문제로 과제 축소” 주장

2013년 10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기구에 제출한 폐기물 처리 관련 기술 제안서.문서에는 에네시스(ENESYS), 한국전력기술(KEPCO-ENC) 등이 주요 파트너로 표시돼 있다.
2013년 10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기구에 제출한 폐기물 처리 관련 기술 제안서.문서에는 에네시스(ENESYS), 한국전력기술(KEPCO-ENC) 등이 주요 파트너로 표시돼 있다.

2014년 7월 국내 주요 언론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ㆍ이하 원자력연구원)의 해외 연구개발(R&D) 수주 성과가 보도됐다.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기구의 공개경쟁 입찰을 통해 387만 유로(당시 약 55억원)에 달하는 사업을 발주 받았고, 이는 원자력연구원이 수주한 역대 해외 R&D 사업 중 가장 큰 규모라는 내용이었다. 보도대로라면 한국 원자력기술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쾌거인 셈이다.

하지만 원자력 업계 인사들에 대한 본보의 취재 결과, 원자력연구원은 함께 입찰에 참여했던 벤처기업 등을 과제 수주 직후 갑자기 배제했고, 급기야 이 기업은 폐업에까지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는 당시 성과를 독점하려는 원자력연구원의 의도가 개입됐다는 정황도 제기됐다. 더구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책 연구기관의 파트너 배제 실태가 드러남에 따라 수주를 준 ITER 기구가 불만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끝내 관련 사업이 중단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명박(MB) 정부시절 국가 에너지 사업을 쥐락펴락한 이른바 ‘원전 마피아’를 떠올리게 하는 행태가 재현된 것은 물론,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국격을 훼손한 사건이다.

9일 원자력연구원과 원전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2014년 ITER 수주 과제는 애초 1단계 설계, 2단계 실험을 포함해 총 3년 과정이었으나, 2015년 5월쯤 과제범위가 변경(축소) 되었고 2016년 6월쯤 종료됐다.

ITER는 차세대 에너지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핵융합기술 연구를 위해 국제사회가 2007년부터 프랑스에 건설 중인 초대형 핵융합실험로이며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과 함께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러시아, 인도가 출자하고 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현재의 원자력은 핵분열을 통한 것이지만, 핵융합을 토대로 한 원자력은 핵분열보다 강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폐기물도 적다. 한국이 ITER에서 수주했던 사업은 이 핵융합의 폐기물 처리 분야였다.

당시 ITER사업 수주를 위한 한국측 컨소시엄은 원자력연구원, 벤처기업 ㈜에네시스, 한국전력기술, 국가핵융합연구소로 구성됐다. 수주 과제는 ITER 운전 중 발생하는 방사성폐기물 가운데 장수명, 중준위급(타입 B) 폐기물을 핫셀(Hot-cell) 내에서 원격으로 처리하는 기술의 개발로 폐기물 특성조사 및 절단, 삼중수소 측정과 제거, 저장 용기 검사와 제염 등 처리기술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원자력연구원은 사업 수주 후 “세계적인 원자력 분야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수주에 성공했다”라며 “우리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제 공동 프로젝트인 ITER 장치건설에 기여함과 동시에 국내 원자력 기술의 위상을 국제무대에서 확인 받게 됐다”고 밝혔다.

◇수주 성공하자 돌변, 기여한 업체 폐업

그러나 원자력연구원은 계약이 막상 체결되자 사전 기술 개발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에네시스 등을 사실상 배제시키며 참여자들의 반발을 샀다. 2014년 4월, 사업 수주가 확정되고 일주일 정도 지나 원자력연구원의 해당 과제 담당자였던 홍권표 박사는 에네시스, 한국전력기술 담당자들에게 “우리 연구원에서는 이 일의 성공적 완수를 위해 앞으로 많은 지원을 해 주기로 하였는데, 이러한 연구원 방침 때문에 업무수행 체계를 많이 바꾸게 되었다”며 “즉, 인력을 보강하여 보다 많은 부분을 연구원이 직접 수행하게 되었고,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지 않아 말씀 드리기 어려우나, 작년 입찰제안 시 구상했던 팀 조직 및 인력구성과는 많이 다르게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알려 드린다”고 메일을 보냈다. 이어 “과제책임자로서 수주를 위해 같이 노력했던 여러분께 죄송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 업무가 축소 혹은 변경될 경우, 이에 대해 양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에네시스 대표였던 한병섭 박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ITER에 사업과제 신청서를 낼 때 전체비중의 30~40%를 차지하는 중요 부분을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실무에서 배제시키고 자문만 하라면서 2억원 밖에 줄 수 없다고 하더라”며 “사실상 나가라는 말과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에네시스는 입찰 제안 계획에서 당시 여섯 가지 태스크 중 비중이 높은 4번 태스크를 전담하고, 2번 태스크를 보조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원자력연구원의 방침에 따라 2번 태스크 완전 배제, 4번 태스크도 연구원이 직접 맡고 에네시스는 보조(자문)로 밀려났다. 결국 에네시스는 이런 방침을 거부했고, 과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에네시스는 원자력연구원에서 2012년 1억5,000만원을 받고 설계개발업무 중 주요 부분인 ‘가스처리장치 및 삼중수소 제거장치(GTS-TRS)의 개념설계’에 성공해, ITER와의 계약체결에 기여했다. 애초 원자력연구원이 다른 업체에 맡겼다가 성공하지 못해서 에네시스에게 급하게 주어진 과제였다. 실제 2013년 3월 원자력연구원이 ITER 관계자에게 보낸 메일에는 “Cutting(방사능 오염물질 원격 절단) 관련해서는 한 박사님께서 주도(총괄)하시고 있다”고 돼 있어, 특정 기술 개발 부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했다.

2005년 설립해 16~20명 가량의 직원을 뒀던 에네시스는 ITER과제에서 배제된 뒤 후폭풍으로 2016년 폐업했다. 한병섭 박사는 “해당 과제는 3년의 연구 기간 뒤 성공리 종료했다면 후속 사업으로 2,000만~3,000만 유로(약 259억~388억원) 정도의 상용화 제작 및 설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며 “한국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상용화까지 이끌 수 있었는데 좌절됐다”고 말했다.

◇ 수주 중단, 원인 둘러싸고 의견 분분

당시 한국전력기술 소속으로 과제에 참여했던 이병식 단국대 교수는 “원자력연구원에서 1차연도에 빠지게 됐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럴 거면 우리 다 안 하겠다. 다 빼라’고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도 했었다”며 “이후 2차연도 사업에는 한국전력기술이 참여하게 돼 있었지만 진행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전력기술이야 불쾌하고 말았지만, (벤처기업인) 에네시스는 타격이 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ITER측에서 기초연구를 주로 하는 원자력연구원만 참여하고 설계를 담당 할 회사들(한국전력기술, 에네시스 등 엔지니어링 업체)의 참여가 없다는 점을 과제 타절(打切ㆍ수주 중단) 이유로 꼽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며 “ITER 내부에서도 다른 국가가 폐기물쪽 일을 많이 하고 싶어하는데 우리나라로 낙찰되다 보니 알력다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확고한 기술력과 능력을 보였다면 이미 계약한 과제를 중도에 타절할 만한 구실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ITER가 이미 계약한 과제를 중간에 중단시킨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만 보기에는 상식적이지 않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원자력연구원 측은 “ITER 내부의 인사문제로 과제가 축소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1단계 도중에 과제범위 등이 변경되었고 변경된 업무에 대해서는 정상적이고 성공적으로 완료됐다”고 해명했다. 당초 1, 2단계로 되어 있던 과제가 1단계만 하는 것으로 축소됐으며 ITER기구에 보고서를 제출해 승인을 받으면 성공이라 보기 때문에 성공종료라고 설명했다. 승인 획득 후에 받은 금액은 214만유로(약 27억원)라고 밝혔다. 당시 김종경 원자력연구원장(현 한양대 교수)도 “ITER에 새롭게 온 간부가 과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이 과제를 축소하기로 했다고 들었다”며 “1단계를 마무리하고, 2단계는 더 안 할 것 같다고 하기에 ‘할 수 없다’고 답했으며, 과제는 축소됐지만 성공 종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병섭 박사는 “3년 과제가 1년 만에 종료됐는데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다니 참 천박한 해석”이라며 “(원자력연구원이 에네시스를 배제시킨 것에 대해) 당시 ITER에 직접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라 망신이라서 참았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핵융합 국제연구과제 수주 일지 및 주체 변경= 그래픽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핵융합 국제연구과제 수주 일지 및 주체 변경= 그래픽 송정근 기자

◇“원자력연구원 독점은 인센티브 때문”

원자력연구원이 과제수주 후 한국전력기술, 에네시스를 배제하기로 한 배경은 분명치 않지만, 연구과제 중심 연구비 지원 시스템(PBS)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소속 연구원들이 일정급여를 받지 않고 마치 자영업자처럼 과제를 수행하는 만큼 그 사업비에서 인센티브(수당)를 받는 것이다. 한병섭 박사는 “원자력연구원 내부 직원들의 수당을 높여주기 위해, 부당하게 외부 협력업체를 배제했다”고 말했다.

실제 원자력연구원이 2014년 4월 작성한 내부 문건을 보면 입찰제안 당시 여섯 가지 태스크 중 연구원은 두 가지만 맡도록 기획돼 있었으나, 과제 수주 후에 변경된 계획에는 연구원이 네 가지 태스크를 맡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런 수행 주체 변경으로 과제 예산 55억원 대부분을 원자력연구원이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병식 교수는 “원자력연구원이 과제를 독점할수록 내부 연구원들에게 금전적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맞지만, 이 사안이 PBS 때문이었는지 확정할 수 없다”며 “다만 PBS는 엔지니어링 사업 등에는 효율성이 있지만, 성공할지 어떨지 모르는 기초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적용하면서 폐해가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원자력연구원은 이 같은 의혹들도 부인하고 있다. 연구원측은 “인센티브를 많이 받기 위해 업체를 배제한 것이 아니며, 과제가 R&D 성격의 일이므로 연구원이 더 많이 하자는 연구원 방침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김종경 전 원장도 “에네시스는 조그마한 회사에 불과해서 원자력연구원과 전문성을 비교할 수 없다”며 “이런 의혹들은 모두 마타도어(중상모략)”라고 했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이정윤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는 “이 사건에는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은 아웃 시키는 ‘원전 마피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병섭 박사가 과거 원전 관련 업체에 전문경영인으로 있다가 직원들의 사채놀이를 적발해 문제 삼았는데, 그 업체 오너였던 J씨가 이 때부터 한병섭 박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내쫓고 원전업계에서 배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J씨는 박근혜 정권과 친분이 깊고 원전업계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인물로 꼽힌다.

이정윤 대표는 “이 사건은 원자력연구원이 최고의 국가 과학기술 연구기관으로서 국가 주요시책인 중소기업과 동반성장 정책에 반해 기술지향적인 벤처기업의 육성과 고급 일자리 창출을 저해시키고, 국가 연구기관 본연의 책무를 망각한 일방적이고 편협한 부당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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