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0년까지 우리나라 에너지 수급 계획을 결정지을 최상위 정책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정부 권고안 발표가 돌연 연기됐다. 권고안에 재생에너지 확대 비율이 상당히 높게 잡혀 정부가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탈원전 정책에 대해 속도 조절에 나선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산ㆍ학ㆍ연 전문가와 시민단체 인사 75명이 모여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이하 에기본)에 대한 권고안을 만들고 있는 ‘에기본 워킹그룹’은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주최로 열린 ‘2018 대한민국 에너지전환 콘퍼런스’에서 권고안을 공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5분 남짓 안정성ㆍ안전ㆍ환경ㆍ공존ㆍ성장 등의 핵심 가치와 에너지 주치의 제도, 갈등 해결 전문기구 설립 등의 원칙적 제안만 공개한 채 마무리됐다.
더욱이 내용도 지난 8월 29일 열린 워킹그룹 중간설명회 별로 다르지 않다. 에너지 전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콘퍼런스엔 수백 명이 참석했지만, 공개가 기대됐던 ▦발전 원가 ▦에너지 세제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등은 모두 빠졌다. 8월 중간발표회 때 워킹그룹이 10월 초 권고안을 발표하겠다고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이상 신호는 사흘 전부터 감지됐다. 워킹그룹은 2일 권고안을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 제출한 이후 기자들에게 사전 브리핑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1일 권고안 제출과 브리핑 모두 취소됐다.
하지만 워킹그룹에 따르면 권고안의 주요 내용은 이미 산업부에 전달됐다. 워킹그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는 “권고안에 재생에너지 비중 목표가 상당히 높게 설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를 본 산업부가 권고안 발표 후 벌어질 논란에 부담을 느껴 발표를 미루려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본보가 복수의 워킹그룹 참가 전문가를 취재한 결과 권고안에는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5%, 30%, 40%로 확대하는 시나리오가 담겨 있다. 한 워킹그룹 총괄분과 위원은 “유럽 선진국들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고려해 최대치를 40%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박재영 산업부 에너지자원정책과장은 공개가 연기된 이유에 대해 “권고안을 무게감 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정책에 반영하기 전 현실 상황을 판단하기 위한 백업 데이터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워킹그룹을 지휘하는 김진우 총괄위원장도 “정부가 타당성을 좀 더 검토해보자고 제안해서, 정책화가 잘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논의하기로 하고 제출을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따라야 할 의무도 없는 워킹그룹 권고안 공개에 이처럼 신중한 이유는 지난해 12월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 발표 이후 쏟아진 친 원전 인사들과 언론의 거센 비판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20%로 높이겠다’고 발표했는데, 2040년까지 최대 40%로 늘리는 방안이 담긴 권고안이 그대로 발표되면 얼마나 큰 반발이 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산업부의 지나친 눈치 보기가 오히려 권고안의 신뢰성을 훼손시킨다는 지적이 많다. 정책 수립 과정의 참고자료인 권고안 작성 단계부터 정부가 그 내용에 개입한다면 민간 전문가가 만든 권고안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누가 인정하겠냐는 것이다. 산업부는 최근 워킹그룹에 녹색성장위원회의 권고안 ‘심의 기준’을 전달하기도 했다. 5개 항목으로 구성된 이 기준에는 ‘에너지 전환의 정책 의지를 반영한 에너지 수요 목표와 실현 방안을 제시’하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민간의 정책 제언에 정부가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임재규 워킹그룹 총괄간사는 “2013년 2차 에너지기본계획 워킹그룹 활동 때에는 심의 기준이 없었다”며 “받아들일지 여부는 내부에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성경 명지대 기초교육대 교수는 “정부는 권고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되 수용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하면서 최선의 방안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산업부가 워킹그룹의 권고안을 기초로 만들 에기본 정부안은 에너지위원회와 녹색성장위원회, 국무회의를 거쳐야 확정된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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