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시절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촉발시켰던 헤겔 철학의 대가 임석진 명지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6세.
고인은 강원 춘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 1961년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헤겔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명지대 교수로 재직했다.
고인은 동백림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사건의 시초는 1967년 한 일간지의 서독 특파원이 체코 취재 중 실종되면서다. 관계 당국이 수사에 나서자 기자의 대학 친구로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에 그를 소개해준 적이 있던 고인은 친분이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홍세표씨를 통해 박 대통령을 단독으로 면담, 독일 유학생들의 북한 접촉 실태를 털어놓았다. 고인은 유학 시절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주변 유학생들을 북한대사관에 소개해줬을 뿐 아니라, 1963년엔 노동당 입당원서를 쓴 적도 있었다.
고인의 자수로 독일 유학생 등 유럽 체류민에 대한 대대적 조사 바람이 불었다. 대부분 큰 경계심 없이 가볍게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3선 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200여명이 연루된 대형 간첩사건인 동백림 사건으로 키웠다. 윤이상 작곡가와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이 고초를 당했다. 정식 기소는 30여명 정도에 그쳤고,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간첩죄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동백림 사건과 별도로, 고인은 헤겔 철학의 대가로 꼽힌다. 유학 때 박사논문 ‘헤겔의 노동 개념’은 독일 현지에서도 극찬을 받았고, 고인은 비판이론가로 유명한 테오도르 아도르노에게 감사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오직 학문에만 몰입했다. ‘정신현상학’ 등 헤겔의 주저를 계속 번역, 소개했고 ‘헤겔 변증법의 모색과 전망’ 등의 책을 써냈다. 1980년대 들어 학술지 ‘헤겔연구’를 만들었고 ‘헤겔연구회’에 이어 1987년 창립된 한국헤겔학회 회장을 맡아 20여년 동안 이끌면서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헤겔 철학을 한국에 뿌리내리도록 했으나, 제자들은 격의 없는 토론을 즐기던 소탈한 스승으로 기억한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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