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남부, 지중해 동쪽의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로 불려 왔다. 직접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에서 유래한 용어지만, 20세기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은 발칸의 나라들을 위성국가로 만들어 버렸고, 소련 몰락과 함께 냉전 시대가 끝난 1990년대에는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사태 등 민족 분쟁이 이 곳을 피로 물들게 했다.
이러한 ‘슬픈 역사’를 지닌 발칸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총성 없는 전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발칸 반도 중부 마케도니아의 국호 변경, 인근의 섬나라 키프로스에서 행해지는 러시아 권력층의 자금세탁을 둘러싸고 미ㆍ러의 물밑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30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마케도니아 국명 변경 국민투표는 찬성률이 91%에 달했지만, 투표율이 유권자 절반에 못 미치는 34.59%에 머물러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 이 국민투표는 국명과 관련, 그리스와의 오랜 갈등을 해소하고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에 가입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다.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을 추앙하는 인근 그리스가 나라 이름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마케도니아 정부는 지난 6월 국호를 ‘북마케도니아’로 바꾸기로 그리스와 합의했고, 국민투표 안건도 “당신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가 체결한 합의안을 수용함으로써 EU, 나토 가입에 찬성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투표율 미달은 미ㆍ러 사이에 갈등의 불씨로 작용할 전망이다. 미국과 서방은 ‘국호 변경’을 지지한 반면, 러시아는 나토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물밑 작업도 벌여 왔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지난달 17일 “러시아가 국명 변경 반대세력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경고를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율 3분의 1, 찬성률 90% 이상’이라는 결과는 미ㆍ러 양측의 아전인수로 이어져 갈등을 증폭시키기 충분하다. 워싱턴포스트는 저조한 투표율에 대해 “서구가 한 방 먹었다”면서도 “러시아가 마케도니아에 허위정보를 대거 유포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미국은 그리스 동쪽 지중해 키프로스에서 러시아 권력층의 돈줄을 죄는 작전에 돌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등 러시아 권력자와 갑부들의 비밀 자금이 세탁되는 곳으로 알려진 키프로스에 대해 미국 규제 당국이 본격적인 제재와 단속에 나섰다. 이 신문은 러시아 신흥재벌이자 키프로스은행 최대주주인 빅토르 벡셀베르크 레노바 그룹 회장에 대한 미 재무부의 금융제재 조치를 대표 사례로 적시했다.
하지만 미국의 시도가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키프로스 경제가 러시아에서 유입된 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다. 수십 년간 키프로스는 무기거래, 도박기업 등과 관련한 러시아 자금이 밀려드는 주요 관문이었다. 이곳의 한 은행 관리는 “러시아는 이 나라 경제를 건설했다. 오이 재배나 하던 시절로 돌아갈 순 없다”면서 러시아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드러냈다. WSJ는 “러시아의 돈 세탁과 워싱턴의 규제기관의 충돌은 결국 미국의 힘이 시험대에 오른 걸 보여준다”고 전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