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서울중앙지법 회의실에서 열린 배석판사정례회의. 중앙지법 배석판사 129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회의실을 메울 정도로 참석 열기가 뜨거웠다. 회의 내내 판사들의 표정은 사뭇 심각하고 격앙돼 있었다.
올 7월 서울중앙지법 한 배석판사가 같은 합의부 내 부장판사 횡포에 못 이겨 법원 고충처리위원회에 알렸지만, 문제가 된 부장판사는 그대로 두고 배석판사들만 교체한 사건에 대한 대응 방안을 주로 논의해서다. 한 배석판사는 “당시 배석이 겪은 고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으며, 왜 그런 결과(배석판사만 변경)에 이르렀는지 밝혀야 한다”고 배석판사 명의의 입장 표명을 주장했다. 이어 ▦합의부 부장에 대한 다면평가 실시 ▦리더십 없는 합의부 부장은 배석판사회의의 논의를 거쳐 법원 내 사무분담위원회에 교체 건의 등 부장판사 ‘갑질’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특정 합의부 배석판사 교체와 관련한 입장표명은 고충처리위원회 접수 사건은 비밀 유지가 필수인데다, 밝힐 경우 대상자가 특정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돼 유야무야 됐다. 문제 부장판사 교체 건의도 자칫 특정인을 감정적으로 저격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신중론에 밀렸다. 이러다 보니 쏟아진 요구사항 중 단 하나도 결의된 게 없다. 상하반기 한차례씩 열리는 정례회의를 통해 ‘갑질’ 부장판사를 대상으로 배석판사들이 ‘반란’을 도모했지만 찻잔 속 미풍에 그친 셈이다. 회의에 참석한 한 배석판사는 “다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의견을 표출하다 보니 현실적인 대안보다 불가능하더라도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한 것 같다”라며 “오죽하면 이런 얘기까지 하겠냐”고 토로했다.
통상 판사 경력 15년 이상의 부장판사와 경력 7년 미만의 좌우 배석판사 세 사람이 합의해 결정하는 지방법원 ‘합의부’ 내 부장ㆍ배석판사 갈등은 곪을 대로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
서울의 한 지법 배석판사는 “배석판사들이 부장판사 등과의 갈등으로 고통을 호소하면 마치 배석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인식되고 평판까지 안 좋아지는 분위기가 있다”라며 “그것이 부당한 일을 겪고도 말 못하는 이유”라고 했다. 반면 서울의 한 지법 부장판사는 “배석들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뒤에서 부장 욕부터 한다”고 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는 풍경이 다르다는 말처럼 부장과 배석의 시각 차가 이처럼 크지만 법원은 뒷짐만 지고 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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