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정도(定道) 천년. 고려국은 전국을 10도(道)로 나누며 ‘금강 남쪽’을 강남도(江南道), ‘바닷가 따스한 땅’을 해양도(海陽道)라 불렀다가, 1018년(현종 9년) 둘을 합쳐 전라도로 삼았다. 강남도의 대표 지역인 ‘전주’와 해양도의 대표 지역인 ‘나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유래된 이름, 전라도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 8도’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전라도는 이후 지명이나 영역의 큰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역사의 고비마다 시대의 물꼬를 바꿔냈던 문제적 공간이었다.
첫째,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淸海)로 대륙실크로드와 해양세라믹로드가 만났던 9세기. 이때 전라도와 서남해는 남원 실상사ㆍ장흥 보림사ㆍ곡성 태안사ㆍ화순 쌍봉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마음 불교, 선종산문이 뿌리를 내렸고, 머잖아 삼한일통의 향배를 결정지었던 핵심 전장이 됐다.
둘째, 전라도의 산하와 바다에서 왜구가 결정적 타격을 입었던 14세기말. 최무선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서남해ㆍ관음포대첩이 특히 유명한데, 이러한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당시 나주로 유배되었던 정도전이 “부로(父老)들이 백성들에게 의리를 알도록 가르친 덕분”이라 하였던 증언을 음미할 만하다. 그런데 고려국은 왜구를 제압한 물자와 군사를 요동 정벌에 쏟았다가 위화도회군을 이끌었던 이성계에게 나라를 넘겼다.
셋째는 이순신의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던 임진왜란이었다. 그렇다면 국가를 보장한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영원한 의병장’ 고경명의 창의격문의 구절은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본도(本道: 전라도)는 예로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으니, 성조(聖朝: 이성계)께서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을 다시 일으킨 공로를 세웠으며, 선조(先朝: 고려)의 낭주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듯이, 유사시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본도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에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그 누가 임금 섬기는 대의를 강독하지 않았겠는가!”
삼한일통과 왕조 창업에 기여한 상무 전통과 의리 실천의 학풍, 교육의 힘에서 의병의 기본 동력을 찾았던 것이다. 실제 16세기 전라도는 박상ㆍ최산두ㆍ양팽손ㆍ이항ㆍ김인후ㆍ유희춘ㆍ기대승ㆍ박순ㆍ정개청 등 기라성 같은 사림학자, 처사학인을 배출하며 당대 학문과 정치를 주도했다.
1895년 23부로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로 갈렸다가 이듬해 13도제가 시행되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일체감과 동질성은 거뜬했다. 이것은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까지 위망과 극단의 시대, 실천적 변역(變易)의 경험을 공유하며 공감하였기에 가능했다. 즉 동학농민전쟁과 국권회복전쟁의 거대한 전장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신국가사회 건설을 향한 학생과 대중운동이 가장 활기찼던 것이다. 나아가 분단과 전쟁, 분열과 차별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와 산업화에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현대사의 분수령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었던 광주오월’에 동행하며 인권평화의 민주정부를 함께 만들어냈음이었다. 이렇듯 전라도는 지난 100년 우리 역사의 중심무대와 같았다.
이러한 역사적 역할이 가능했던 사상문화적 저변은 무엇일까? 필자는 기정진 학단의 실천성리학, 동학, 단군신앙 대종교에 주목하고 싶다. 이들 셋은 논리는 엄연히 달랐지만 이면을 관통하는 하늘을 따르고 마음을 지킨다는 핵심에서는 서로 상통했다. 즉 기정진은 인심이 천리(天理)이며 나라는 작은 백성을 근본 삼아야 함을 역설했고, 동학은 하늘 공경으로 마음을 닦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야 함(事人如天ㆍ사인여천)을 설파했으며, 대종교는 국가는 망해도 하늘의 도는 살아있음(國亡道存ㆍ국망도존)을 확신했던 것이다. 여기에 호양호혜(互讓互惠)의 실천윤리를 구현한 천주교, 기독교문명이 새로운 정신자양을 보탰음을 간과할 수 없다.
장기적 시야 관점에서 살폈을 때 전라도 사람의 시대적 부상, 역사적 실천은 ‘공동체정신의 구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3세기 몽골 침략기 장성의 효자로 훗날 삼강행실도에 오른 서릉(徐稜)이 ‘가서십훈’을 실천한 이래로 서로 착하게 살자는 향촌책임운동이 활발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을 표방했던 이선제의 ‘광주향약’이나 정극인의 ‘태인향약’은 전국적으로도 가장 빠르고 영향력이 컸고 또한 오래 지속됐다. 그러한 향약 공간이 마을누정, 회사정이었다.
어떠한 시대, 어느 나라든지 자신의 역사전통 문화역량을 무시하고 타인의 시각으로 당당한 미래를 맞이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최근 광주시와 전남ㆍ북도가 공동으로 ‘전라도사’ 편찬에 착수하고, 미술관ㆍ박물관 등이 ‘천년의 과거와 미래’ ‘천년의 하늘과 땅’ ‘천년을 지켜온 사람들’과 같은 다양한 학술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업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_여기_우리’의 관점에서 기억의 역전, 시선의 회전이 필요하다. 이때 그간 우리를 짓눌러왔던 식민과 차별의 산물인 ‘중심-주변’ ‘신(新)-구(舊)’ 프레임을 걷어내면서 아울러 ‘변방 트라우마’ ‘근대 콤플렉스’를 떨쳐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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