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협상 재개를 앞두고 ‘북한을 비핵화 대화로 이끈 건 대북 제재’라는 미국 논리에 맞서 북한이 ‘프레임’(인식 틀) 전환을 본격 시도하고 나섰다. 상호 신뢰 형성 및 관계 개선을 막아 도리어 협상을 교착시키는 적대적 관성이자 구태(舊態)일 뿐이라는 게 북한 주장이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29일(현지시간) 미 뉴욕 유엔본부에서 제73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미국에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제재가 우리의 불신을 증폭시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면서다. 그는 “조미(북미) 공동성명의 이행이 교착에 직면한 원인은 미국이 신뢰 조성에 치명적인 강권의 방법에만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라며 “미국은 70년 전 공화국이 탄생한 첫날부터 우리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실시해 왔으며, 자국 기업들이 우리나라와 나사못 한 개도 거래하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경제 봉쇄를 감행하고 있는 나라”라고 비난했다.
국제사회를 상대로도 자세 전향을 촉구했다. 리 외무상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귀중한 평화 기류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라며 “핵실험과 로켓 시험발사가 중지된 지 1년이 됐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들은 해제되거나 완화되기는커녕 토 하나 변한 게 없다”고 불평했다. 그러면서 “안보리는 국제평화 안전에 도움이 되는 사태 발전을 지지하고 환영하고 고무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주문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도 가세했다. 이날 ‘제재와 대화는 절대 양립될 수 없다’ 제하 논평에서 “미국이 제재 압박의 도수를 높이면서 상대방과 대화하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모순”이라며 “미국은 대세의 흐름을 옳게 가려 보고 선택을 바로 하여야 할 것”이라고 질책했다.
북한의 대미 여론전(戰)은 중국ㆍ러시아와의 협공 양상이다. 신문은 최근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이행을 둘러싼 미국ㆍ러시아 간 갈등과 미 정부의 중국 업체 대상 독자 제재 부과와 관련한 중국의 반발 등을 거론하며 “제재를 문제 해결의 만능 수단으로 삼는 미국에 의해 복잡한 문제들이 계속 산생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대화 분위기 조성에 대북 제재가 크게 기여했다는 미 정부의 ‘제재 효과론’에는 ‘제재 무용론’으로 적극 반박했다. 리 외무상이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의 망상”이라고 역설한 데 이어 노동신문도 “미국이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은 제재 압박이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 정부도 강경 일변도의 미 제재 정책이 늘 바람직한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28일 뉴욕에서 한국 특파원들을 만난 정부 고위 당국자는 ‘완전한 비핵화까지는 완화도 안 하겠다는 게 정부 입장이냐’는 질문에 “완전한 비핵화 확신이 있을 때까지 제재를 유지한다는 원칙에서는 미국과 우리가 같은 입장”이라면서도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속도에 따라 융통성을 갖고 상황에 따라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도 25일 미 케이블 뉴스 채널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비핵화 상응 조치의 하나로 제재 완화를 거론한 바 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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