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당신을 생각해요.” 그렇게 시작하는 연애 소설이다. 기준영(46) 작가의 장편 ‘우리가 통과한 밤’. “오랫동안 당신이 아팠어.” 소설은 그 고백에 이르는 여정이다. 아픔이 너에게로 가는 길이 되는 것, 사랑이다. 동성의 사랑이라면 오죽.
마흔인 채선과 스무 살쯤인 지연. 채선은 “두 번째 애인이 어느 한낮 신축 건물 창문을 열고 뛰어 내린 뒤” 사랑을 멈춘 사람이다. 고아인 지연은 처음부터 사랑을 모르고 산 사람이다. 둘은 서로를 알아본다. 극장에서다. 채선은 난생처음 연극 무대에 서고, 관객인 지연은 그에게 빠진다. 지연은 구애한다. “당신이 내 유일한 고통이면 좋겠어요. 그러면 다른 건 다 괜찮아질 거야.” 채선은 머뭇거린다. “친구로서 안아 줄게…” 그러면서 고개를 흔든다. “내가 얼마나 정상인지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증명해 보이리라…”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 세상의 편견에 부딪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소설의 독특한 지점이다. 둘은 그저 자기 마음 때문에 아파한다. 가슴 쥐어뜯는 부모도, 혀로 상처 주는 지인도, 흘겨 보는 행인도 없다. “진짜 추하다.” 지연의 옛 남자친구가 한마디 하지만, 아무도 추하지 않다는 걸 소설을 따라 읽은 독자는 알게 된다. “모르핀을 맞는 게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 생겨나고 강하고 용감해져. 그래서 내가 더없이 나인 것 같아.” 모든 사랑은 사랑이며, 어떤 사랑만 사랑으로 인정받는 건 부당하다는 걸 지연은 그렇게 확인한다.
우리가 통과한 밤
기준영 지음
문학동네 발행∙284쪽∙1만3,000원
소설은 긴 연극 같다. 기 작가는 진짜 같은 이야기를 쓰는 것엔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현실과 소설 사이에 장막을 쳤다. 채선, 지연의 말부터 연극 대사를 닮았다. “전 잘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정말 잘할 거예요, 당신한테.” “내 숨통을 틔워준 사람이 날 구속해 줬으면 좋겠어.” 채선, 지연을 기 작가가 부르는 이름도 그렇다. 채선은 소설 속 연극 배역인 마고로, 지연은 세례명인 엘리자베스 혹은 리사로 호명된다. 이건 연극이야, 라고 작가가 자꾸 환기하는 것 같다. 채선의 꿈이 삽입된 환상극처럼, 지연의 편지가 독백처럼 등장하는 것도 극적이다.
채선, 지연의 마음을 비추는 것, 기 작가의 관심은 온통 그거다. 마음을 촘촘하게 묘사하는 문장에 힘을 많이 줬다. “아픈 사람이 자기를 돌아봐달라고 부르는 소리 같았다. 아니면, 당신은 아픈 사람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당신’이라고 부르는 지연의 말에 설레는 채선의 마음이다. “지연은 나와 함께인 ‘오늘들’ 속에서 숨쉬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기 때문에, 그 바람을 깨끗이 도려내버린다면 이제 자기의 시간을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 붙여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했고, 또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지연의 흔들리는 마음이다. “어디에서든 어떤 사람들은 분명하게 서로를 알아보게 되기를.” 작가의 말에 남긴, 기 작가의 마음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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